한 사내가 두터운 코트의 깃을 올린 채 큰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연인에게 버림받고 한 겨울 방랑의 길을 떠나는......
음악의 힘은 대단했다. 무대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베이스 함석현 님의 공연을 보고,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버렸다. 연가곡의 섬세한 흐름과 한 남자의 소리와 표정과 손의 어울림에 숨이 막혔다. 몰입도 최상이었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들판에서 부르는 연가에 마음이 아렸다. 공연 사진을 찍고 싶어 손가락이 계속 꼬물꼬물 거렸고,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행복했다.
나의 행복은 나 스스로 찾아 느끼는 것이다. 요즘 빠져있는 행복한 일은 레이스 뜨기를 하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손자 태오의 여름옷을 뜨개질하고 있다. 면사가 얇고 코바늘이 가늘어서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살은 패일 듯이 아프지만 그래도 즐겁다. 누군가가 본다면 비장하다 싶을 만큼 집중하는 모습에 뭔가 엄청난 작업을 하는 줄 알 거다. 초보 할머니가 주먹구구식으로 뜨는 아기 옷인데 말이다. 미소가 지어진다. 할머니가 떠 준 옷을 입은 내 손자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이렇듯 뜨개질도 재밌는 일이지만, 삶을 만끽하는 내가 좋아 보여서 스스로에게 잘 살고 있다는 셀프 칭찬을 한다.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은 하루하루를 보내며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를 되뇐다. 자기만족의 다른 표현이다.
가끔은 느리게 걷는 즐거움도 만끽한다. 삼청동 ‘감고당길’을 거닐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꽤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골목길의 지루함을 없애려 함인지 옹벽과 담벼락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아버지가 일을 가실 때마다 빨랫비누를 얼굴에 썩썩 칠하고 도루코 면도칼로 쓱쓱 면도를 하던 그 낡은 거울이 담장에 걸려 있었다. “This is not a mirror” 란 제목의 이 깨진 거울은 작가에겐 작품의 센스를 돋보이게 했고, 내게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골목은 참 재밌었다. 홀로 앉아 기타를 치는 젊은이의 연주는 걷던 길에 보이지 않는 ‘멈춤’ 표지판을 내밀었고, 잘 생긴 젊은이가 끄는 인력거는 계속 눈길을 잡아끌었다. 조금만 눈을 돌리고 생각을 바꾸면 재미난 일상이 전개된다. 한나절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마음에 활력이 한가득 들어찼다.
나이가 드니 백발의 성성함은 미용실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얼굴의 잔주름은 감출 수가 없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아이가 어느새 예순을 넘기고 주름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하건 거리낌이 없는 데다가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작년 12월 31일 밤, 새해를 기다리며 조촐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남편과 와인으로 건배를 했다.
“당신 하고 싶은 거 있음 새해에도 열심히 해요.”
“오~ 여보, 당신 진심이지?”
새해에는 남편이 한 이 말만은 꼭 듣겠다며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지금까지는 두 발로 딛고 설 수 있는 길만 있으면 나를 다스릴 수 있었다. 내 속의 나를 들여다보며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 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무릎이 심술을 부리고, 허리가 파업을 하고, 어깨에는 바윗돌이 올라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돌이켜보니 그동안의 삶에서 독서의 힘으로 삶의 무게를 지탱한 적도 꽤 있었다. 성격이 바뀌었고 정신과 마음은 차분해졌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근무 시간에 읽었을 거라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원칙을 중요시하는 공무원이었으니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내가 책으로 치유받은 경험이 있어서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힘내라고 책을 사서 선물했다.
“감사해요. 도서관에 계셨으니 책이 많이 생기지요?”
“아! ‘내돈내산’인데요”
웃으며 말했으나 괜히 선물했다고 후회했다. 이제는 적당히 냉철하고 적절히 조화롭게 관계의 중요성을 인지하면서 살아야겠다.
티베트 속담에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가 있다. 삶의 변곡점을 지나서 돌아보니 내 인생이 잘 피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걱정을 하고 있겠는가. 걱정 따위는 사양하겠다. 그리고 누리라고 있는 기쁨을 베이스에 깔고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