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줌마는 용감하다

by 하람

내가 외국을 가는 경우는 단순 여행도 있지만 버킷리스트 실행이 더 많았다.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곳을 찾아가는 재미는 가슴이 벅차올라 매번 흥분이 됐다. 고산 트레킹도 그렇다. 가장 먼저 히말라야 땅을 밟았었다. 2016년 봄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에서 히말라야의 신에게 인사를 드렸을 뿐인데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때부터 히말라야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ABC 트레킹을 준비할 때였다. 경비는 이미 딴 주머니에 들어 있었고, 동계용 침낭은 비박을 다녀오며 진즉에 사놓았고......

출국 전날 밤 남편이 내 짐을 보더니 기함을 했다.

“당신 네팔로 여행 가는 거 아니었어?”

“네팔의 히말라야로 여행을 가는 건데, 왜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지만 고산 트레킹이 처음이라 불안하긴 했다. 남편이 꼭 알고 있어야 할 통장과 가족들 보험증서 등속을 알려주는데 기분이 묘했다. ABC를 잘 다녀온 이후 해마다 고산 트레킹을 다녔다. 좋은 길동무도 여럿 사귀었다. 그러다가 코로나 시국을 만났다. 국내로 눈을 돌려 사람이 없을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안동의 ‘농암종택’은 이때 알게 된 숨어 있는 휴식처이다.


농암 이현보 선생이 나고 자란 농암종택은 안동의 오지인 도산면 가송리에 있다. 직계자손이 현재까지 650여 년 대를 이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며 한옥에서 숙박을 한 적은 꽤 있으나 종택에서 머무는 건 처음이라 기대가 컸다. 종손인 이성원 선생은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를 쓴 작가이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 사인을 받기 위해 갖고 간 덕에 나와 내 친구들은 안채로 건너와 술 한 잔 함께 하자는 저자의 제안을 받기도 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때 살던 집은 외풍이 심했다. 군불을 때 방바닥은 절절 끓어도 코가 시려서 이불을 뒤집어쓰던 겨울밤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종택도 옛집이라 외풍만은 어쩔 수 없었다. 문풍지를 붙였건만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막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위기는 비교를 거부했다. 종택이 갖고 있는 중후함을 어찌 내가 자란 시골집과 비교할 수 있을까. 고요한 밤에 동무들과 17대 종부가 빚은 ‘일엽편주’를 마셨다. 술 이름인 ‘일엽편주’는 농암 선생의 ‘어부가’에서 따왔고, 글자는 퇴계 선생의 글자 중에서 뽑아 붙인 것이라 종부가 알려줬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시름을 잊는 이 술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와~! 이거 완전 앉은뱅이 술이야.”

“맞아. 술에서 꽃향기가 나. 어쩜 이리 술맛이 좋을까. 술~술 넘어가는데.”

술맛에 반해서 앉은뱅이 술이니 어쩌니 하며 건배를 했다. 우리가 앉은뱅이 술이라 함은 겁 없이 마시다가 일어나지 못할 만큼 취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었다. 술에서 나던 꽃향기가 입안에서 맴을 돌고 있었다.

세상이 코로나로 몸살을 앓는데 초로의 세 여자가 겁도 없이 길을 떠나 한적한 시골 종택에서 여유를 부렸다. 가송협 물길을 바라보며 숨어 있던 ‘예던길’을 걸었고, 제 자리를 지키는 농암종택의 종손과 종부 덕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향유했다. 내치지 않고 객을 받아준 종손의 결단이 고마웠다.


어느 날 뉴스에서 코로나 단계를 ‘심각’에서 ‘경계’로 하향 조정하며 확진자 격리의무도 해제한다고 했다. 이 소식은 내 발에 다시 바퀴를 달아주었다.

‘뚜르 드 몽블랑’ 트레킹을 준비하고 6월 12일부터 24일까지 걷고 돌아왔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에 걸쳐 있는 몽블랑 산군을 한 바퀴 도는 이 길을 사람들은 알프스 트레킹의 클래식이라고 말한다. 막상 가서 걸어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세계 도처에 이처럼 매력적인 길이 있는데 내가 어찌 걷기를 멈출 수 있겠는가. 특히 이번 길 떠남에는 정말 입어보고 싶었으나 용기가 없어 실행하지 못했던 트레킹용 레깅스를 구입해 갖고 갔다.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나이 의식하지 않고 제 멋에 겨워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트레킹 2일 차에 드디어 엉덩이까지 가려지는 긴 티셔츠에 그것을 입고 걸었다. 마치 젊은이라도 된 양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른 사람들은 내 옷차림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틀 안의 사회생활이 몸에 익어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지 못했던 내 사고방식이 한 꺼풀 벗겨지자 다른 세상이 보였다. 문제는 스스로 만든 울타리 안에서 벗어날 생각을 안 했던 내게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는 소신껏 행동하며 즐겨야겠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출발할 때는 마지막 트레킹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 예순을 넘긴 이후부터 생긴 습관이다. 걷기에 집중하며 즐기다가 언제든 고산 트레킹을 접게 된다면 아쉬워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뚜르 드 몽블랑’에서 건강하게 돌아오니 다음 트레킹은 또 어디로 갈까 궁리부터 하게 된다.

예전에 히딩크 축구 감독이 우리나라 대표팀을 16강에 진출시킨 뒤 했던 인터뷰에서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심정을 알 것 같다. 컨디션 관리와 체력 안배를 잘해서 걷지 않았던 다른 길을 좀 더 오랫동안 걷고 싶다. 세상은 넓고, 볼거리도 걸을 길도 아직은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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