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여자, 쿨한 여자, 좋은 여자가 홉쇠를 의지해 몽골로 길을 떠났다. 홉쇠는 몽골의 ‘홉스골’을 사랑하는 정오의 별칭이다. 우리는 ‘테를지 국립공원’ 안의 ‘게르’에 머물면서 자유롭게 몽골을 즐기다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넘어가기로 했다.
여자 셋이 모이면 한 사람은 따돌림을 당하기 십상이라던데, 다행히 우린 말이 잘 통해 더욱 친밀해졌다.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며 깔깔거렸고, 낮엔 툴강 지류의 숲길에서 말을 탔다. 그러나 나는 말 타기를 한 번 해 본 후 내 취향의 놀이가 아님을 바로 알아차렸다. 몽골까지 와서 말을 안 타고 돌아가면 후회할 것 같아 체험 삼아 타본 것으로 만족했다. 대신 ‘Camp Bolbom’ 뒤의 바위산을 트레킹 했다. 깎아지른 암벽이 조심스럽긴 했으나 징기즈 칸이 정벌에 나서듯이 덜 험해 보이는 방향으로 코스를 잡아 오르기 시작했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천상의 세계인 양 아름답게 펼쳐진 평원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바위산 꼭대기에 천상의 화원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이래서 길은 걸어봐야 알 수 있다. 가보지 않았던 길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행복이 몽골의 바람을 타고 마음에 스며들었다.
몽골의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음은 엄청난 혜택이었다. 우리끼리 마음만 맞추면 거리낄 것이 없었다. 우연히 만난 몽골 젊은이들의 씨름판은 더위가 무색했다. 초원에서 벌어진 씨름판 속에 끼어 각자 맘에 드는 젊은이를 응원하느라고 목청을 높였고, 툴강으로 소풍 나온 몽골가족을 만나 식구처럼 함께 ‘허르헉’을 먹었다. 우리가 갖고 간 간식까지 모두 나온 잔치 한마당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몽골 들판에서 낮잠 자기’가 들어있었다. 일행들이 수다를 떨 동안 나는 준비해 간 1인용 매트에 누워 단잠을 잤다. 역시 잠은 보약이다. 기기묘묘한 구름을 쓰고 있는 광활한 초원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덕에 자유롭게 즐기는 여행의 묘미를 만끽했다.
우리는 몽골의 ‘울란바타르역’에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열차 ‘쿠페’를 탔다. 이 기차는 중국 북경에서 출발해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가는 기차이다. 한쪽은 긴 복도로 되어 있고, 맞은편은 4인 1실로 이층침대가 마주 보는 형태이다. 그러니 쿠페를 모르는 사람과 한 팀이 되어 탄다면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다. 다행히 우리는 세 여자에 홉쇠가 끼어 한 칸을 차지했으니 완벽한 우리들 세상이었다.
한참 웃고 떠들던 와중에 홉쇠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오뚜기 토마토케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왜? 어디 가려고?”
“갔다 와서 얘기해 줄게”
흡족한 얼굴로 돌아온 홉쇠는 기관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왔다고 했다. 기관사들에게 뇌물성 선물로 최고의 것이 ‘오뚜기 케첩’이라니 나 참!
기차는 광활한 몽골 대평원을 지나 ‘수흐바타르역’에 닿자 한 시간 정도 몽골 출국 수속을 밟고 러시아 땅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나우쉬키역’에서는 장장 세 시간에 걸쳐 러시아 입국 수속을 밟았다. 밀수자들의 수 신호 방지를 위해 창문의 커튼은 내려야 했고, 군인과 엄청난 크기의 탐지견이 밀수품을 찾는 동안 모든 승객은 복도로 나가 도열해 있었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국가였기에 이런 경험이 처음인 우린 말 한마디도 못한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온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남자 군인(혹은 경찰) 1은 1층 침대에 올라서서 2층 침대는 물론이고 창틀까지 살폈다. 군인 2는 탐지견에게 모든 것의 냄새를 맡게 했다. 여자 군인 1은 승객들을 개 훈련시키듯 다루어 마치 범인 취조를 받는 것 같았다. 무표정하고 딱딱한 군인들로 인해 모두가 긴장했다.
‘울란우데’를 출발한 지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창밖으로 바이칼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구간이 횡단열차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란다. 울울창창한 자작나무 숲과 가없이 펼쳐지는 바다 같은 호수가 그대로 그림이었다. 이르쿠츠크역에는 출발 다음 날 저녁에 도착했다. 긴 시간을 기차에서 어찌 머물까 싶어 지루함을 걱정했는데 웬걸, 유쾌한 일행 덕에 정말 즐거웠다. 좋은 이웃과 함께 해서 내 삶에 풍요로움이 더해지는 시간이었다.
앙카라 강변의 자작나무 숲에서는 찰랑거리는 잎사귀 소리에 귀가 상쾌했다. 바람은 달콤하고 자작나무에 닿는 햇살은 사랑스러웠다. 마음속 찌꺼기가 다 날아간 듯 가볍게 걸었다.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호는 가없이 펼쳐진 수평선까지 바다의 그것과 닮았다. 드넓은 호수가 담수호라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바이칼호수의 물은 유일하게 앙카라강으로만 나간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그 강을 거쳐 바이칼호 물 위에 서 있으니 꿈만 같았다. 바이칼호수 위를 떠다니는 배 안에서 ‘오물’을 구워 먹었다. 바이칼호에만 산다는 이 물고기는 특유의 향 때문에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 아니면 먹어볼 수 없는 음식이란 생각에 마지막 한 점까지 남기지 않았다. 축복받은 날이 이어졌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꼭 해보고 싶은 무언가를 품고 산다. 나도 그렇다. 건강이 받쳐준다면 많은 것을 해 보고 여러 곳을 가고 싶다. 아는 만큼 보고 본 만큼 즐기고도 싶다. 이번 여행도 그런 것이었고 온전한 내 것이었다. 호숫가에서 선탠을 즐기는 러시안과 패딩으로 추위를 피하는 나는 같은 값이었다. 그들의 망중한이 곧 내 것과 같음이었다. 순간을 즐기며 누리는 만족감, 이것이 사는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