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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07. 2024

집을 나서다

집을 나섰다. 어슬렁거리는 삶이 가능할지에 대한 두근거림을 애써 누르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새벽 4시, 집 밖으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묘한 설렘이 있었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뺨을 간지럽히며 떠남이 현실임을 자각시킨다.      

공항을 향해 가는 새벽 버스는 무한 질주 본능을 숨기지 않았다. 길 위에 맞수가 될 만한 차들이 거의 없다는 게 그 이유였을 게다. 내닫는 내 마음만큼이나 빨랐다. 애써 잠을 청해도 잠들지 못하는 깨어 있는 정신은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후의 모든 일은 완전히 내 몫이다. 이른 아침의 인천공항은 보이지 않는 분주함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각자의 삶을 옮기기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 그 무리 속에는 프랑스 남부 국경 마을인 생장을 향해 가는 나도 끼어있다. 그들과 일원인 양 수속을 밟고 트랩을 오른다.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어느덧 나이가 계란 두 판을 넘었다. 한 판이 찰 때까지는 부모님의 보호막 안에서 살다가 두 판을 채우기 시작하며 그 보호막을 깨고 나왔다. 결혼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치열하게’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정신없이 살았다. 어느덧 내 나이는 세 번째 계란 판 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직장인, 며느리, 아내 그리고 세 아이의 엄마인 나는 인생 2막을 준비하는 발걸음을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떼기로 했다. 이 길이야말로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동경의 길 아니던가. 길 위에서 어제의 나를 돌아보고 현실을 직시하며 내일을 설계하고 싶었다. 혼자가 되어 생각의 늪에 빠져보고 싶기도 했다.      

은퇴 후의 삶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평생을 종종거리며 시간을 쪼개 살던 내가 어느 날부터 시간의 쫓김을 받지 않게 된다면 쉽게 적응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 시간이 어떤 삶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했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니 내가 지향하는 느리게 사는 삶은 어려울 것 같기도 했다. 

정리가 필요했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했던 40일간의 여행. 이 길 떠남이 갖고 올 긍정의 나비효과를 기대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길(Camino Frances), 포르투갈길(Camino Portugues), 은의 길(Via de la Plata), 북쪽길(Camino del Norte) 등 여러 루트가 있다. 이렇듯 여러 개인 순례길 중에서 나는 프랑스길을 걷기 위해 생장으로 간다. 이 길은 순례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걷는 길이다.      

9시 5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열두 시간여를 날아 프랑스 샤를드골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공항에서 내리면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 몽파르나스역까지 이동한다. 그 후  TGV를 이용해 바욘까지 가고, 다시 버스나 TER로 갈아타고 생장피에드포르까지 간다. 대략 다섯 시간 이상이 걸리는 이 움직임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혹여 다음 차편과 시간 연결이 잘 안 된다면 시간을 거저 흘릴 뿐만 아니라 비용과도 연결된다. 나는 조금 더 단순하게 움직였다. 드골공항에서 국내선으로 환승해 비아리츠까지 1시간 25분을 이동한 후 버스로 생장까지 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환승 시간이 많이 남아 공항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파리에서 꽤 떨어진 도시 외곽의 공항은 할 것도, 갈 곳도 없었다. 기차에서 시간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처럼 공항에서 시간 싸움을 벌였다.         


생장에 도착했을 때는 하루가 막 저물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을은 프랑스길의 시작점이다. 스페인 동북쪽에서 육로로 진입하는 관문 국경선이 모두 프랑스에 접해 있어서 프랑스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숙소로 가는 길에 만난 문 닫힌 약국에 유독 눈길이 머문다. 우리나라라면 아직 영업을 마치기에 이른 시간이다. 삶의 질을 중요히 여기는 것 같아 이곳의 생활 문화가 궁금하다.      

숙소는 깨끗하고 고요하다. 내일 하루는 생장에서 머문다. 준비물을 점검하고 간식도 구입하며 도시를 돌아볼 생각이다. 생장이 이 나라를 대표하는 지역은 아니지만 내가 갖고 있는 프랑스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호기심이 인다. 고요한 이 도시는 과연 어떤 색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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