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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08. 2024

'생장'의 하루

생장(Saint-jean-Pied-de Port)은 인구 1,500여 명의 작고 깨끗한 도시이다. 그래서인지 번잡하지 않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생동적이지 않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관광객이나 순례자들의 방문이 없다면 경제활동에 상당한 제약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용한 도시를 걷는다. 


정갈한 벽돌이 박힌 골목길을 올라간다. 뤼 드 라 시타델(Rue de la Citadelle) 9번지에 위치한 순례자 사무소를 찾아가는 길이다. 까미노 화살표가 길 위에 박혀 있다. 가리비나 노란 화살표가 아닌 까미노 표식들도 눈에 띈다. 한국에서 건너간 키 작은 순례자에게 길의 친절이 인상적이다.      

      

순례자 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이미 순례길을 걸었던 사람이 순례를 떠나는 이들의 서류 수속을 도와주고 순례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2유로의 비용을 지불하고 ‘크레덴시알(Credencial del Peregrino)’을 발급받았다. 크레덴시알은 순례자 여권이다. 이것이 있어야만 순례자로서 알베르게(Albergue, 저렴한 순례자 숙소)에 머물 수 있고, 레스토랑에서 부담 없는 가격으로 순례자 메뉴를 제공받을 수 있으며, 성당이나 박물관을 들어갈 때 할인 혜택도 받는다.       

쎄요(sello)는 순례 여정을 알 수 있는 확인 도장으로 크레덴시알의 정해진 칸에 찍는다. 각 도시를 지날 때마다 알베르게는 물론이고 바(Bar), 레스토랑, 관공서 등 다양한 곳에서 받을 수 있다. 경유하는 도시마다 두 개 이상의 쎄요를 받아야 한다. 크레덴시알의 칸이 다 차면 다시 구입해 방문 인증용 쎄요를 받는 순례자도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걷다가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에서 마지막 쎄요를 받는 것으로 크레덴시알의 역할은 끝난다. 이렇게 쎄요로 채워진 크레덴시알을 산티아고대성당 인근의 순례자협회에 제시하면 순례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줄을 서서 기부함에 약간의 기부금을 넣은 후 순례의 상징이자 표식인 가리비 껍데기를 받아 배낭에 매달았다.      

순례자 사무소의 자원봉사자들은 친절했다. 어렵사리 모든 수속을 끝내고 그들과 기념사진까지 찍은 후 마을을 어슬렁거리는데 동양인으로 보이는 젊은이와 반려견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배낭을 짊어진 반려견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에서 자신의 반려견과 함께 걸으러 왔다는 재독 한국인 젊은이였다. 

낯선 소도시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젊은이를 만나니 여간 반갑지 않다. 응원의 의미로 엄지를 쭉 올려 보이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순례길 위에 서 있는 나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걸음걸이는 느리고 모습은 후줄근하겠지만 눈동자만큼은 반짝거릴 것이다. 내적 성장을 위한 고행이라면 기꺼이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작은 도시 구경이 흥미롭다. 니베(Nive) 강가에 지어진 14세기 고딕 양식의 노트르담 성당을 바라보며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생각한다. 8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대 건축물이 2019년 4월에 한 순간의 화재로 첨탑과 지붕이 큰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화재가 나고 세 달 후, 센 강을 유영하는 유람선을 탔었다. 배 안에서 모두 타버린 첨탑과 지붕의 형태를 바라보며 울화로 가슴이 뜨거웠던 기억이 떠올라 상념에 빠진다.     

      

니베강의 물길에 둘러싸인 마을은 아름답고 정갈하다. 가끔 순례자 사무소로 향하는 예비 순례자들과의 만남만 없었다면 사람 구경하기도 어려울 만큼 고요한 오후의 평화가 나무늘보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달팽이가 기어가듯 느린 걸음으로 윈도쇼핑을 하고, 숙소 부근 작은 마트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 먹을 간식으로 사과를 몇 알을 샀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지만 어린 시절에 먹었던 홍옥처럼 붉은 사과가 크기도 딱 고만하다. 순간적으로 어릴 때 먹던 사과 향이 입 안에 퍼지고 새콤달콤함이 그득하니 침으로 고인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에서 만난 사과가 내 어린 시절 추억 한 자락을 떠오르게 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하루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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