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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11. 2024

피레네산맥을 넘다

- 걷기 1일 차 -

아침 7시, 해발 1,450m의 피레네산맥 레푀데르 언덕을 넘어 풍요의 땅 나바라주로 들어서기 위해 길을 나선다. 아침 식사는 숙소에서 크로와상과 오렌지주스로 간단히 해결했다. 어둠을 뚫고 생장의 숙소를 나서니 비가 내린다. 부랴부랴 판초우의를 덧입고 어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시타델 거리를 벗어났다.   

   

에스파냐문을 빠져나가는 것으로 순례는 시작되었다.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전 구간 중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한다던데 오늘 날씨가 심상치 않다. 꽤 굵은 빗줄기에 긴장하며 걷는다.    



이번 여정에서 나의 보호자는 나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하고, 판단해야 한다. 마음을 단단히 다잡는다.      

피레네산맥은 북쪽의 프랑스와 남쪽의 스페인을 가르는 천연의 국경이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넘나들던 피레네 산맥을 스페인 정복을 위해 넘어가는 나폴레옹 군대의 일원이라도 된 양 전투적으로 넘는다. 

가장 먼저 도전장을 내민 것은 비와 함께 몰아치는 바람이다. 몸을 휘감고 도는 엄청난 바람에 다리가 휘청거린다. 눈을 뜨기도 걸음을 내딛기도 어렵다. 아우성치는 모자를 한 손으로 붙잡으며 다른 손으로는 재빨리 모자 끈을 조인다. 최대한 바람이 못 들어오게 옷매무새도 다잡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예고도 없이 우박이 동반된 빗줄기가 사정없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려온다. 춥다. 추워도 너무 춥다.      

비, 바람, 우박, 싸락눈, 해님으로 이어지는 변화무쌍한 날씨에 몸도 마음도 지친다. 거센 바람에 몸이 휘청거려 중심 잡기 바쁜 나를 상대로 해님은 들락날락, 빗줄기는 오락가락거리며 희롱한다. 

이솝우화 『바람과 해님』 속의 젊은이처럼 판초 우의를 입었다 벗었다 하며 경황없이 걷느라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개를 돌렸다. 피레네산맥의 비아코리(BiaKorri) 성모상이 눈에 들어온다. 목동들의 수호신인 성모상이 꼿꼿하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게 아닌가. 가파른 경사의 벤타르테아(Bentartea) 언덕, 거센 바람과 급변하는 기후로 항상 안개에 뒤덮여 있다는 이곳은 양들의 방목지이다. 양치기와 양들의 이미지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친 날씨의 변화는 이곳의 복병이란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이곳에 머물며 피레네 산맥의 양치기를 보살펴 주신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바람에 펄럭이는 옷깃을 여미고 경건하게 두 손을 모은다. 길 위의 순례자로서 피레네산맥을 무사히 넘을 수 있도록 성모님의 가호를 갈구한다는 의미가 담긴 나만의 의식이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정면으로 맞서는 내 몰골은 말이 아닐 것이다. 호흡은 가빠지기 전에 조절하고, 근육은 지치기 전에 풀어줘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겨를이 없다. 얼굴은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고 장갑을 낀 손이 곱아 스틱을 잡기도 쉽지 않다. 

날씨가 매섭다. 앞서가던 순례자들이 빨리 오라 손짓을 하지만 마음과 달리 발걸음은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스페인 국경에 인접한 프랑스 땅의 트럭 카페에서 핫 초코 한 잔으로 언 몸을 녹인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걷는 길이라 갖고 있던 주전부리를 낯선 순례자들과 나누며 서로를 응원한다. 

프랑스에서의 첫 쎄요이자 마지막 쎄요를 트럭 카페에서 찍고 다시 발걸음을 뗀다.      



유럽이 연합된 후 가장 큰 변화는 국경의 의미가 흐려졌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도 산길 중턱의 나바라 선돌이 가르고 있다. 단 한 걸음으로 나라가 바뀌지만 피레네산맥으로 인해 스페인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 문화가 다르다. 수백 년에 걸친 이슬람의 지배가 유럽 속에서 다른 문화를 꽃피웠기 때문이다.        

국경선도 군사도 없는 산길에서 발걸음 하나로 국경을 넘고, ‘롤랑의 샘’에서 차가운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온몸의 세포들이 긴장한다. 롤랑의 샘(Fontaine de Roland)은 프랑크왕국의 기사 롤랑의 이름을 붙인 샘이다.


롤랑은 11세기 중세유럽 최대 서사시 ‘롤랑의 노래(Chanson do Roland)’에 등장하는 비극적인 영웅으로 프랑크왕국의 황제 샤를마뉴 휘하의 기사였다.      

롤랑의 군대는 론세스바예스의 협곡에서 전투에 패했고, 적군과 뒤엉켜 있는 자신의 군대를 찾기 위한 샤를마뉴 대제의 기도는 기적을 일으켰다. 롤랑의 병사 입에서만 장미꽃이 피어났으니 말이다. 이로써 시신을 찾아 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이곳은 장미의 계곡(Rosis Valle)으로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가 되었다. 

롤랑의 샘은 롤랑의 군대가 피레네산맥에서 마셨던 물에 붙인 이름이고 '롤랑의 노래'는 바로 이 전투를 노래한 서사시이다.    


    

레푀데르 언덕을 내려오자 스페인의 첫 마을 론세스바예스에 다다른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위는 적막감과 썰렁함으로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너도밤나무 숲 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처음으로 회색빛의 큰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알베르게이다.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이 머무는 숙소이다. 오늘 머물 알베르게의 첫인상은 수도원이었던 때문인지 엄숙하다. 크게 말하면 안 될 것 같고 발걸음도 조심해야 할 것 같은 중압감에 행동이 신중해진다. 

피레네산맥을 잘 넘고 숙소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에 안도한다.     


* 걷기 1일 차 (생장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2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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