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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05. 2024

내 안의 나를 만날 수 있을까

-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여행 -

프롤로그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한 길 떠남을 계획했다. 성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800km의 프랑스길.

거개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야곱의 혼이 깃든 이 길을 걷지만, 나는 천주교보다는 불교가 더 몸에 익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가슴에 품고 있던 바람이 있었다.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그 길 위에서 내 안의 나를 만나고 싶다는.     


3년짜리 적금을 부었다. 시간은 정년퇴직 전에 주어지는 공로연수기간을 활용했다. 공로연수계획서에 꾹꾹 눌러쓴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는 가슴 떨림이었다. 버킷리스트 하나를 실행할 수 있다는 부푼 기대감이 함께였다. 관련 도서를 찾아 읽기도, 정보의 바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평범한 길이 아님을 알기에 사전 지식을 챙겼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성 야곱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선교를 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 야곱의 제자들이 시신을 사공도 닻도 없는 배에 태워 바다로 내보냈고, 그 배는 선교지였던 이베리아반도 끝 갈리시아 해변까지 흘러갔다.

순례자의 상징이 가리비가 된 것은 야곱의 시신을 태운 배의 외관에 가리비가 다닥다닥 붙어서 파도로부터 야곱을 보호했다는 설과, 산티아고 근처의 바닷가에서 가리비를 기념품으로 주워오기 시작하면서 시작됐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아무렴 어떠한가. 순례자 표식이 가리비여도, 다른 그 무엇이어도 내게는 문제 될 것이 없다. 그저 정해진 표식을 배낭에 매달고 묵묵히 걸을 것이다.     


야곱의 시신은 ‘리브레돈’의 산에 묻혔고 관심에서 멀어졌다. 자연스레 무덤의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갈리시아의 벌판에 떨어진 성스러운 별빛을 따라가던 은둔 수도승 '페라요'가 들판에서 한 구의 유골을 발견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영주와 왕으로부터 성 야곱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이 소문은 전 유럽으로 퍼졌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을 시작한 무렵이었다.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기 위한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한 시기였기에 성 야곱의 무덤은 최적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알폰소 3세는 산티아고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짓고, 스페인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있던 '오비에도'에서 야곱의 무덤으로 향하는 9세기 순례 길을 최초로 개척했다. 10세기 순례 길은 알폰소 3세의 둘째 아들 오르도뇨 2세에 의해 개척되었다.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를 성지로 선포했고, 산티아고까지 순례하는 사람의 죄는 모두 없애주겠다고 발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레네산맥을 넘고 레온을 거쳐 산티아고로 몰려들었다. 죄의 사함과 동시에 이베리아 반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야곱을 경배하기 위함이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12세기 프랑스 길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자연스레 길이 정비되고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성당과 수도원이 생겨났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부터는 순례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시 방문자가 늘어난 계기는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 방문과 1993년에 프랑스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 때문이었다.   



내가 걷고자 하는 길의 의미를 알고 나니 기대감이 커진다. 잘 걸어 꼭 완주하고 싶다.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는 별들의 들판이라는 라틴어 ‘campus stella’로 불리다가 야곱의 스페인어 이름인 산티아고를 붙여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가 되었다.      


나는 ‘폐라요’가 별빛을 따라간 그 들판을 걸을 것이다. 그러나 복병이 있다. 한 달 이상 집을 비우는 주부의 고충은 가족들의 협조로 해결되었으나, 노년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중년 여성의 체력적인 부담이 허리춤을 잡고 늘어졌다. 가장 큰 걱정은 다리였다. 굳은살처럼 자리를 잡아가는 발바닥의 크고 작은 티눈들과 가끔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경고하는 무릎의 시큰거림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      


순례길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주말마다 배낭을 꾸러 산을 오르내렸다. 피부과에서는 발바닥의 티눈을 제거했고, 정형외과 의사는 한 달 치 소염진통제를 처방해 주었다.

비상식량, 간식, 응급약품 등 준비물을 챙기고 환전까지 마친 후 배낭에는 태극기 엠블럼을 꿰매 붙였다.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의 표현이었다. 이제는 떠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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