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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17. 2024

안개가 내 몸을 싸고도는 듯하네

- 걷기 2일 차 -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발걸음으로 7시 30분에 알베르게를 나선다. 스페인은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 서머타임(summer time)을 시행하는 나라이다. 내 젊은 시절에 우리나라도 서머타임을 시행했다. 하루를 더 길고 알차게 쓸 수 있어 선호하던 사람이 꽤 많던 정책이었다. 그러나 다시 원점으로 환원된 우리나라의 시간 속에서 스페인으로 건너오니 이곳의 서머타임이 잠을 한 시간 뺏어간 듯 생경스럽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을 헤드렌턴으로 깨우며 노란 화살표가 제시하는 방향을 따라 걷는다. 노란 화살표는 파란 가리비 그림과 함께 까미노의 공식 표식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등대 역할을 한다. 

길은 좋다. 어제 걸은 길을 생각하면 이 길은 고속도로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자만은 금물이다. 한 달 이상을 걷는 긴 여정이라 발의 컨디션을 세심하게 살피며 그때그때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바스크어로 다리의 마을이란 의미의 ‘수 비리’로 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져 마음까지 온화하다. 걷기에 손색이 없다. 하루 만에 바뀐 자연환경으로 어제의 꿀꿀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어둠이 떠나고 안개가 걷히자 몽환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산 할아버지가 구름 모자를 썼다는 노래 가사처럼 구름에 둘러싸인 동화 같은 풍경이 연이어 펼쳐져 발걸음이 자꾸 지체된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여기에 더해 만나는 마을마다 예쁘기 그지없다. 오래되어 고풍스러운 집들은 세월의 흔적과 함께 곱게 나이를 먹었고, 늘어선 꽃들은 순례자를 환영한다며 두 팔을 벌린 것처럼 활짝 피어있다. 성당의 종소리는 또 어떠한가. 이래저래 기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다.      


가을 속에 빠져 걷다가 불현듯 현실로 돌아온다. 멍 때리며 걸었다는 걸 알게 되는 이런 순간은 고마운 힐링이다. 무념무상은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동안 숱하게 오르내리며 걸었던 산과 들판이 그러했다. 쌓인 스트레스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생각이 없어지는 상태가 지속되곤 했다.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따사로운 햇살과 보드라운 바람결이, 때로는 나뭇잎의 바스락 거림이 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엄마의 손길 같았다. 지금이 딱 그때와 같은 상태이다.       


발걸음이 가볍다. 기계적인 걸음이 아닌 내 안의 나와 교감하며 걷는 길이 달콤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는 또 어떠한가. 이들에게서 삶의 다양성을 본다. 이 속에는 나의 것도 있다. 드러내지 못했으나 상처로 아파하던 지난날의 나의 삶도.      



아르가(Arga) 강을 가로지르는 라 라비아(La Rabia) 다리를 건너는데 발가락의 느낌이 이상하다. 아픈 듯이 아리고 신경에 거슬린다. 길가에 앉아 양말을 벗고 살폈다. 끝까지 잘 걸으려면 발에 찬 습기와 열이 빠지도록 가끔은 맨 발을 노출시키기도 해야 한다. 발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완주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새끼발가락이 성이 났는지 먈갛게 빨개져 있다. 두 켤레나 신은 양말 속에서 성이 날 정도라면 강도가 센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빨리 발에 문제가 생긴다는 건 내 계획에 없던 것이다. 시험을 치르다가 예상 문제에 없던 것이 출제돼 당황하는 기분이 이럴까. 문제가 커질까 봐 긴장된다. 알베르게에 도착하기 바쁘게 샤워를 하고 통증 오일로 발가락을 마사지했다.    

  

통증 오일 등 장거리 걷기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용품 일습은 충청남도 공주시에 사는 검지 쌤의 선물이다. 내가 산티아고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충남 공주에서 강원도 춘천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 마음을 알기에 꼼꼼하게 다리를 살피고 주문을 건다. 끝까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비 뿌리는 잿빛 도시의 운치는 멋스럽기 그지없는데 내 기분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걷기 위해 온 길 위에서 발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스럽다. 이제 막 시작했기에 더 그럴 수도 있다. 출발에 앞서 전지훈련 삼아 국내의 산들을 다녔던 그 피로 때문인지, 길들였다는 생각으로 별 고민 없이 신고 온 새 등산화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냉랭한 알베르게에서 심란함을 감추려고 일찌감치 침낭 속으로 파고든다. 인정사정없이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에 원망의 눈총을 보낸다. 의기소침하다.       


출발 전에 함께 책 읽기를 했던 상화 쌤이 고통의 신비를 묵상한다며 응원의 문자를 보내왔다. 

행복이랑 고통이 함께 한 날이지만 그래도 오늘이 고맙다.      


걷기 2일 차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Zubiri)) 23km / 누적거리 4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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