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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18. 2024

보이지 않는 헤밍웨이와 교감하다

- 걷기 3일 차 -

오늘도 어김없이 7시 30분에 숙소를 빠져나왔다. 헤드랜턴이 없다면 길 찾기 어려울 만큼 깜깜한 아침이라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기는데 걸음걸이가 불편하다. 피레네산맥을 넘을 때 성이 나버린 새끼발가락이 아직도 떼쓰기를 그치지 않아 발바닥까지 아프다.


오늘 코스는 어제보다 거리가 짧아 수월할 거라 여겼는데 오산이다. 너덜길이 계속 이어져 걷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발가락을 신경 쓰느라 편하게 걷지도 못하겠다. 그런데 주변 경관은 왜 이리 아름답단 말인가. 목가적인 풍경에 취해 느리게 걷다가 우쿨렐레를 끼고 앉아 쉬고 있는 순례자를 만났다. 일본에서 왔다는 웃음 많은 청년에게 주저 없이 연주를 부탁했다.

자연을 배경으로 바람을 벗 삼아 연주하는 음악은 계산이 필요 없다. 마음속에서 햇살 같은 무언가가 쨍하고 울렸다. 행복의 물결이다. 이런 소소한 기쁨으로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목적지에 닿으리라. 마음이 편안하다.  



길을 걷다가 나바라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 있다는 13세기에 세워진 성당에 대해 들었다. 이미 지나온 길이지만 주저 없이 되돌아 그 성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한참을 걸어 도착한 자발디카(Zabaldika)의 성당은 문이 굳게 잠겨 열리지 않았다. 나를 본 누군가가 안에서 열어주지 않을까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인기척이 없다. 아쉬움에 고개를 빼들고 한참 동안 종루를 바라보다가 디시 팜플로나로 향한다.      

 

팜플로나는 나바라주의 주도답게 지금까지 거쳐 온 마을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큰 도시이다. 번화가에는 버거킹이 보이고 한국 라면을 살 수 있는 상점도 있다. 그렇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약국을 찾는 일이다. 순례길 위에서 약국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대부분 작은 마을을 지나기 때문에 생필품 상점을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이다. 그러니 당연히 약국은 기대할 수 없다.

이렇듯 문명의 이기를 포기한 채 걷다가 팜플로나에 도착하니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약사는 벌겋게 성이 난 내 발가락을 한참 바라보더니 발톱이 빠질 거라고 했다.     

 

오랜 시간 걷는 순례자에게 발의 컨디션은 정말 중요하다. 큰 도시의 약국들이 걷기를 지원하는 다양한 의료용품들을 갖추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나는 발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바느질할 때 사용하는 우리나라 골무와 비슷하게 생긴 의료용품을 구입했다. 성이 난 새끼발가락에 끼우면 걷기가 수월할 거라고 약사도 추천했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인의 손으로 세워진 팜플로나는 매년 7월 6일 정오부터 14일 자정까지 ‘소몰이(San Fermin) 축제’가 시작된다. 팜플로나 시청 발코니에서 팡파르를 울리는 것과 동시에 시작되는 이 축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나는 소몰이의 흥행과 더불어 소설 헤밍웨이의 『해는 다시 떠오른다』와 시드네 쉘던의 『시간의 모래밭』 이 기여한 바가 컷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통 의상을 입은 소몰이꾼이 황소의 뿔과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소를 유인하면 투우장까지 광란의 질주가 시작된다. 소몰이꾼과 소가 가까이 달리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지만 이들은 가까이서 달릴 수 있음을 명예스럽게 생각한다. 뜨거운 태양과 열광하는 구경꾼들로 절정에 이른 축제의 열기는 작품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해는 다시 떠오른다』는 헤밍웨이의 1926년 작품이다. 작가는 1923년부터 여러 차례 축제에 참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때의 열기 가득한 분위기와 소몰이의 역동적인 모습을 책 속에 자세히 묘사했다. 이로 인해 책을 읽은 독자들이 팜플로나를 방문하고 축제에 직접 참가해 봄으로써 축제의 흥겨움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시간의 모래밭』 역시 첫 페이지부터 산 페르민 축제에 관한 이야기로 줄거리가 시작된다. 황소의 질주로 아비규환이 된 팜플로나 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어 축제의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팜플로나를 방문한 기념으로 소몰이 동상을 보러 나갔다. 빗속에 다리를 절면서 찾아간 동상은 황소와 함께 참여자들의 보이지 않는 질주와 들리지 않는 함성이 보이고 들리는 듯했다. 거기에 더해 비에 젖어 역동적이기까지 했으며 실로 거대했다.


팜플로나에는 헤밍웨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는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유서 깊은 카페(Bar) ‘이루나’에서 그와 동시대 사람인 양 여유롭게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1888년에 생겼다는 이 카페에는 헤밍웨이의 동상은 물론이고 가 늘 앉았던 자리를 그대로 보존해 놓음으로써 작가를 추억하게 만든다.  

어쩌면 헤밍웨이는 소설 속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이 팜플로나에 머무를 때, 그때도 이루나 2층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 광장을 내려다보면서 커피를 마셨을지 모를 일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혼자 걷는 사람을 뭉치게 하는 힘이 있다. 걷다 보면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서로의 이런저런 사정을 이야기한다. 내 경우가 그랬다. 발가락이 문제를 일으키자 길 위의 많은 사람들이 걱정해 주었다. 그중의 몇몇과 가스 띠요 광장 인근의 유명한 ‘하몽’ 맛 집을 찾아갔다. 이베리코 하몽을 안주삼아 마시는 맥주가 입에 착 감기는 순간 발가락의 통증은 잊혔다. 행복했다. 사람들과의 수다는 힐링이었고 바게트빵 위에 올려 먹는 하몽은 신세계였다. 집으로 돌아가면 분명 이 순간이 그리울 것이다.      


* 걷기 3일 차 (수비리~ 팜플로나(Pamplona) 20.5km / 누적거리 69.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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