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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19. 2024

빼르돈 언덕을 오르면 모든 것이 용서될까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를 묵상하며 발가락 상처가 씻은 듯 낫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기적처럼 잘 걷길 바랍니다. 환희의 신비를 묵상하며 기도드립니다.’

‘대통령이 DMZ가 산티아고 길처럼 평화의 길이 되면 좋겠다고 언급했단다. 오늘도 힘내시게!’

‘와인 한 잔 하고 주무세요. 걱정되네요.’

‘오늘도 기록을 만드셨네요. 인생의 기록요.’     


이웃의 응원이 이어졌다.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외에도 파스를 발바닥에 붙이고 걸으면 파스가 피부역할을 해 발이 덜 아프다고 조언해 준 이웃 등 걱정해 준 지인들의 염려를 마음속에 품었다. 그리곤 새끼발가락에 발가락 골무를 끼우고 발바닥엔 파스를 붙이고 다리에는 테이핑까지 한, 마치 전쟁터를 향하는 군인처럼 중무장하고 비장하게 팜플로나를 출발한다.       


동이 트려면 아직도 먼 7시 15분.

오늘 걷는 길의 하이라이트는 빼르돈 언덕이다. 중세의 순례자들은 이 고개를 넘기 위해 사리키에기(Zariquiegui)의 레니에가(Reniega) 분수에서 몸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가다듬었다는데 나는 날씨가 계속 변덕을 부려 꾀죄죄하고 후줄근한 모습으로 오른다.  

이곳은 우리에게 용서의 언덕으로 알려진 곳이다. 사진으로 많이 소개되었기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나 가본 듯이 익숙한 풍경이 이미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비는 오늘도 오락가락해 연신 우의를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지만 다행히 보호대를 한 발가락이 어제보다 힘을 받아 걷기가 수월하다.

발은 도보 여행자에게 최대의 무기이자 도구이다. 그런 만큼 발과 다리의 컨디션 유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쉴 때에도 주저 없이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고 발을 말려줌은 이 때문이다. 마치 의식을 치르는 듯한 이 행동은 다리를 쉬게 하는 동시에 발가락 물집을 예방해 준다. 성치 않은 다리에 발가락 물집까지 생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이들만큼의 속도를 낼 수 없어 계속 추월을 당한다. 마음속으로는 연신 '멈추지 말고 꾸준히'를 외치지만 걱정까지 날리지는 못하겠다.

오른발이 문제다. 발 상태가 더 나빠져 끝가지 못 걸을까 봐, 함께 걷는 순례자에게 민폐를 끼칠까 봐 등등 쓸데없는 걱정들이 계속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일본 청년을 다시 만났다. 조금 전에 나를 추월한 젊은이였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동질감으로 서로 반가워하다가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기고 다시 헤어졌다. 어차피 순례자들은 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짐이 일상이다. 아마 이 젊은이와도 계속 그럴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관계의 동물이다. 늘 누군가와 연관 지어진 삶의 시간이 흐른다. 어디에서 누구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시절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자 안개가 짙어졌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워 발걸음 내딛기가 조심스럽다. 산줄기를 따라 늘어선 풍력발전기의 프로펠러 소리는 왜 또 이리 엄청나단 말인가. 귀가 먹먹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점점 심해지는 안개에 주위를 살피기 위해 구부렸던 고개를 들었다. 순간 내가 ‘알토 델 빼르돈(Alto del Perdon, 용서의 언덕)’ 고갯마루에 서 있음을 알아차렸다.  


서로를 알아보기 힘든 짙은 안갯속에서 용서와 화해를, 평화와 안식을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누군가로부터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혼돈의 카오스가 얽히고설킨다. 용서라는 단어에 온몸과 정신이 꽁꽁 묶여 사고가 정지된 듯 생각이 멈추더니 다시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연신 눈을 깜빡거린다.     

 

770m 높이까지 올라온 발 아픈 나에게 셀프 칭찬을 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조형물의 희미한 형상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어 아쉬움에 탄식을 내뱉는 순간 마법이 풀리기 시작했다. 찰나적으로 세찬 바람이 불어와 안개를 싹 걷어내고 순례자 형상의 철제 조형물과 이정표 하나를 눈앞에 데려다준다. 열두 명의 순례자, 두 마리의 말, 두 마리의 당나귀 그리고 한 마리의 개가 서로 의지하며 걷고 있다. 녹이 슬어 낡은 조형물은 지친 내 모습과 흡사하다.


철로 만든 순례자 행렬 속에 내가 서 있음을 느낀다. 내 안의 나를 꺼내 이들의 일행으로 놓아둠은 나도 이들처럼 꿋꿋하게 서 있고 싶다는 바람의 실현이다.   

다시 바람이 몰고 온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조형물을 제대로 볼 수 있었음에 안도한다. 세월의 흐름으로 점점 더 낡아져 갈 조형물의 일행으로 보이지 않는 나를 이곳에 남겨두고 발걸음을 옮긴다. 안개와 비바람과 거센 눈보라를 이겨내는 조형물처럼 나도 올곧게 서 있을 것이다.           


아픈 다리를 달래 가며 내려갈 길은 엄청난 너덜 길이다. 누가 이렇게 많은 돌덩이를 쏟아부었는지, 다른 대안은 없었는지 아쉽기만 하다. 지친 순례자들이 걷기에는 길이 너무 험하다. 걸을 엄두가 안 난다.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 번 쳐다보는 닭처럼 마을이 있을 까마득한 언덕 아래와 걸어야 할 너덜 길을 번갈아 바라본다. 휴~! 긴 숨을 내뱉는다.        


내가 누구인가. 어떤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는가. 기원의 돌무더기에 조그마한 자갈 하나를 조심스레 올려놓고 발걸음을 옮긴다. 천천히 내려가 보자.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사랑이 고팠나 보다며 인생의 기록을 만들고 있다고 격려한 이웃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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