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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22. 2024

Y자형 십자가를 만난 것은 신의  은총이지

- 걷기 4일 차 -

전설의 성모상을 만난 것은 용서의 언덕을 내려와 ‘푸엔떼 라 레이나’에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온통 밭으로 이루어진 황량한 길가였다. 성모상이 덩그러니 홀로 있었다.


오래전에 일본인 순례자가 걸을 수 없는 지경의 발로 성모상 앞에 서서 기도를 드렸단다. 계속 걷고 싶다는 간절함이 담긴 기도였다. 그 후 기적처럼 발이 나아 순례를 마칠 수 있었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성모상을 새것으로 교체해 놓은 것이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이 성모상이 바로 그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성모상 아래에 빛바랜 봉헌물과 빈 생수병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순례자들이 봉헌물을 놓을 줄만 알았지 누구도 관리에는 신경 쓰지 않은 결과였다. 나는 신자가 아니어도 마음이 쓰이는데 신자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내가 찍어 올린 사진을 본 선배가 문자를 보내왔다.      

 

“근데 성모상 아래는 쓰레기인 겨? 아니면 봉헌물인 겨?”      


종교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간의 내적 성장에 영향을 끼친다. 약해지는 마음에 보이지 않는 정신력이 투입되면 기적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성모상이 보여준 신비로운 현상이 바로 그러하다. 무한한 희망을 갖게 하는 손길은 종교의 힘이다.



점심은 Uterga마을 끝의 Camino del Perdon에서 먹었다. 이곳은 알베르게도 겸하고 있는 레스토랑이다. 순례자들 사이에 맛 집으로 알려졌다기에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이 들어갔다.

여왕의 다리 인접 지역에서 나오는 소고기로 요리한 ‘플라또 제니(Plato Jenny)’는 스테이크 맛 집 요리답게 맛났고 양도 충분했다. 그러나 이 맛을 극대화시킨 공로는 단연 맥주에 있다. 지친 상태에서 마시는 한 잔의 맥주는 기쁨이다. 계속 느끼지만 유럽의 맥주는 내 입맛에 안성맞춤하다. 향도 깊이도 나의 취향과 맞아떨어져 계속 마시고 싶어 진다.

      

맛난 점심이 위로가 되었나 보다. 기분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발은 여전히 불편하지만 이 정도면 걸을 만하다.       

 

오늘의 목적지는 ‘뿌엔떼 라 레이나’이다. 실제로 ‘아르가강’에 놓인 여왕의 다리가 마을 이름(뿌엔떼 라 레이나)이 된 것이다. 11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이 석조다리는 강물로 먼 길을 돌아야 하는 순례자들의 발품을 덜어준다. 여왕의 명으로 만들어졌다더니 그래서 다리와 마을 이름이 '여왕의 다리'가 되었나 보다. 다리는 교각과 상판의 디자인도 멋지지만 동심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만난 성 야곱 상도 인상적이다. 어찌 이리도 지치고 지친 나그네의 형상일까. 지금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울컥해진다. 야곱을 나와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함은 내가 지쳤기 때문이리라.


힘없는 발걸음으로 알베르게를 향해 걷다가 ‘산타 크리스토성당’을 만났다. 순례길 위에서 만나는 마을 성당은 모두 들러보겠다 작정하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지나치려 했다. 발걸음이 무거워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찰나에 기도드리고 나오는 현지인 할머니 두 분을 만났다. 들어가 십자가를 보고 가라는 권유에 호기심으로 성당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이런 까닭에 'Y자형 십자가를 만난 것은 신의 은총이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당 안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눈에 들어온 십자가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반듯한 열십자 형의 그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축 늘어져 계시는 처음 본 형태의 십자가. 중세기 최고의 고딕형 십자가로 알려진 Y자형 십자가였다. 전 세계에 오직 다섯 개 밖에 없는 작품이라는데 간발의 차로 놓칠 뻔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행운에 안도하며 지친 눈으로 바라보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간절함뿐이었다.       

 

지쳐 도착한 ‘뿌엔토 알베르게’의 주인장은 순례자 모두에게 자신의 운세를 뽑아보게 했다. 내가 뽑은 운세는 Sunshine. 내 앞길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으로 내가 나를 응원하는데 여수 형님이 불쑥 나타나 주먹 쥔 손을 내민다. 형님도 운세가 잘 나와 그 기분을 유지하려고 숙소 앞 기념품 가게에서 배지 세 개를 샀단다. 여수 형님과 라푼젤 언니와 내가 동시에 같은 배지를 배낭에 꽂으며 웃음을 나눴다. 낯선 길 위에서 처음 만났지만 생각이 같고 말이 통해 많은 시간을 공유하는 고마운 형님과 언니. 이 두 사람은 지친 나에게 항상 위로로 다가온다.    


알베르게는 공립과 사립으로 구분된다. 저렴하게 6유로의 금액으로 많은 순례자를 수용하는 공립에 비해 사립은 조금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 비용은 조금 더 받는다. 오늘 머무는 알게르게는 사립으로 시설이 좋고 깔끔하다. 비용을 조금 더 지불하면 2인실을 배정받을 수도 있다. 도미토리는 12유로, 2인실은 20유로이니 이 정도는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금액이다.  

길에서 만난 라푼젤 언니와 2인실에 들었다. 쾌적함에 마음이 흡족하다. 다른 이들의 코 고는 소리를 듣지 않고 숙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벌써부터 마음이 가볍다.      


이상화 쌤이 나를 위해 환희의 신비를 묵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감사하다.      


* 걷기 4일 차 (팜플로나~ 뿌엔떼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25km / 누적거리 94.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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