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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23. 2024

내게 길동무가 생겼다

- 걷기 5일 차 -

아침 출발은 활기찼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걷는 게 힘들다. 발가락과 발바닥까지는 각오했지만 무릎이 아파올 줄이야. 빗속에 진창길을 걷느라 발걸음이 무겁고 더디다.


오늘의 나는 재투성이 신데렐라와 같은 이미지의 흙투성이 순례자이다. 진창의 흙이 튀어 엉망이 된 바지와 젖은 신발이 가관도 아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자전거 순례자는 빗속을 유쾌하게 지나가며 손을 흔든다. 자전거에 매단 국기로 보아 이탈리아 순례자인가 보다. 불현듯 남편에게 했던 제안이 떠오른다.

중년이 지난 나이에 자전거를 배운 후 타는 재미에 빠져 살 때의 일이다. 곧잘 타게 되자 세상 어디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하늘을 찔러댔다.      


"여보, 나랑 같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자전거로 완주해 볼래요?"

"나야 좋지"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그땐 그 실력이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여겼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부렸던 만용이었다. 막상 이 길 위에 서 보니 그런 무모만 말을 꺼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순례길은 다양한 사람들이 동질감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그러면서 크고 밝은 목소리로 서로에게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인사를 건넨다. ‘좋은(평안한) 순례길 되세요.’라는 말로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리에 힘이 빠지니 인사하는 목소리도 씩씩하지 않다. 이미 지쳤다. 하지만 세상은 얼락배락 요지경 속이다. 빛과 그림자처럼 다가온 고마운 사람을 둘이나 만났으니 말이다.      


느린 나와 보조를 맞추며 함께 걸어주는 라푼젤 언니가 그중 한 명이다. 첫인상은 예쁘고 우아해서 손에 물도 안 묻혀본 사람 같았다. 그런데 겪어보니 웬걸, 사람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여성이 아닌가. 누구와도 말이 잘 통해 모두와 어울림에 거리낌이 없다. 시쳇말로 서울깍쟁이같이 새초롬해 보이는 언니의 반전은 털털함이다. 세련된 외모와 달리 의리와 정의로움으로 중무장한 사람.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       


편견이나 선입견의 무서움을 다시 상기한다.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먼지를 톡톡 털 것만 같던 여성이 품고 있는 내면세계는 진한 곰탕 국물 같다. 외모와 달리 뚝배기에 담긴 진국의 은근함은 닮고 싶은 것이다. 명예 퇴직한 여자와 정년퇴직할 여자의 의기투합에 힘입어 화두를 하나 정해놓고 걸어야 할까 보다.         


또 한 사람은 나의 뻔뻔함이 형님으로 삼아버린 여수 형님이다. 이 형님은 발가락이 아프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졌다. 여수에서 왔다는 이 분은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의 임원으로 평생을 바쁘게만 살아왔단다. 그런 탓에 출장이 아닌 순수한 여행을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제대로 쉴 줄 모르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가장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은퇴를 앞두고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고 했다.

말이 통하는 두 사람에게서는 진한 한국인의 정(情)이 느껴진다.  


에가(Ega) 강을 끼고 있는 에스떼야(Estella)는 오늘 걸음의 종착지이다. 11세기 초 별에게 이끌려 온 양치기들이 별이 내려온 곳에 묻혀 있던 성모상을 발견했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마을. 그래서 마을 이름이 별이란 뜻의 에스떼야이다.

 

빗물과 진흙탕 길 걷기에 질릴 즈음에 도착한 알베르게는 공립이라 숙박비가 저렴하다. 이 말은 곧 비용을 아끼는 순례자들이 선호하는 숙소라는 뜻이고, 많은 순례자로 인한 소란스러움과 산만함을 옵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말 그동안 머물렀던 알베르게와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까지의 알베르게는 공사립 구분 없이 남녀 순례자들을 구분해 침대 배정을 했는데 이곳은 혼숙이다. 도미토리뿐만 아니라 샤워실, 화장실 등 모든 것이 남녀 공용이다. 당황스럽다. 지금까지의 나와 앞으로의 내가 충돌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샤워할 때는 옆 칸에 남성이 있을까 봐, 화장실에서 문을 열 때는 남성이 소변기 앞에 서 있을까 봐 등등 성(性)이 먼저 의식되어 행동을 위축시킨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나 스스로 성의 울타리를 부수고 나오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생각을 바꾸었다. 서서히 불편한 상황과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자유롭다. 이곳에 모인 순례자들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사람일 뿐인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것이다.


알베르게의 모든 것은 순례자를 위해 존재한다. 순례자는 함께 머무는 이들과 다음에 들어올 순례자를 생각하며 머물러야 다. 시설 사용이 그렇고 행동 제약이 그렇다. 자유 속에서 유지되는 질서에 익숙해져야 한다.   

   

저녁 식사용 식재료를 사기 위해 규모가 꽤 큰 마트에 갔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발견한 맥주, 내가 좋아하는 ‘파울라너’가 1유로였다. 바구니가 묵직하도록 몇 개를 챙겨갖고 숙소로 돌아와 수다를 떤다. 저녁 식사가 풍요롭다.      

 

* 걷기 5일 차 (뿌엔떼 라 레이나 ~ 에스떼야(Estella)) 22km / 누적거리 116.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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