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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24. 2024

신부님의 축성기도를 받은  묵주 팔찌

- 걷기 6일 차 -

계속 비 오다 처음으로 맑게 갠 날인데 오늘이 마침 여수 형님 생일이란다. 친해진 사람들이 모여 함께 아침을 먹었다. 쌀밥에 미역국과 오이무침이 전부인 상차림이지만 오랜만에 먹는 한식이니 진수성찬이나 다름이 없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 생일은 어찌 알았고 미역은 또 어디서 구했는지 감탄스럽기만 하다.      


내 오른발은 여전히 애물단지가 되어 관심받기를 바란다. 스틱에 의지해 절뚝이며 걷는데 다른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뭐지 싶어 눈길을 돌리다가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살아계신 성모마리아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ia la Real de Irache)의 이라체 포도주 샘이 그곳에 있었다. 순례자들이 원하면 얼마든지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수도꼭지가 담벼락을 뚫고 나와 다. 얼른  배낭에서 시에라컵을 꺼내 받아 마셨다. 와인 한 잔에 기분이 하늘로 올라가 발의 통증이 잊히는 듯하다.  


수도원의 배려가 감사하다. 부르고스까지 가는 길가에 이어져 있다는 포도밭을 아직 현실감 있게 만나기도 전인데 와인 인심부터 만났다.

여수 형님이 빈 물병에 와인을 조금 담더니 가방에 넣는다. 안 되는 행동일 텐데 싶었으나 차마 말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떴다. 얼마를 걸었을까 내 발걸음의 속도가 늦어지자 형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와인을 꺼내 한 모금 마시게 했다. 형님의 돌발 행동은 내게 사용할 와인 진통제였던 것이다. 속세에 찌든 나는 형님의 그 마음을 읽지 못했다. 부끄러움과 감사함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오늘은 신발 때문에 복숭아뼈 주변이 아프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름이 끼쳐 결국 신발을 바꿔보기로 했다. 트레킹화는 배낭에 매달고 슬리퍼를 꺼내 신고 걷는다. 통증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발목을 건드리지 않으니 견딜만하다.    

  

길은 인생을 닮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의 삶처럼 길의 상태 또한 예측할 수 없다. 마른 흙길을 걷자니 양말이 뽀얘지도록 먼지가 올라앉는다. 언젠가 이 흙먼지 길이 깔끔하게 포장될 날이 올까?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에 절대 그렇게는 안 될 거라 단언할 수도 없다.

그늘 하나 없이 뜨겁기만 한 순례 길이 오늘은 고행길이다.      


길 위의 사람은 누구나 자유인이다. 자유는 사람임을 인식하고 억제하며 조율하는 자신과의 경쟁이다. 나아감도 멈춤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다리 상태가 썩 좋지 않은 나는 수시로 멈춘다. 이때의 멈춤은 휴식이기도, 진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생각의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변화의 시간이 나를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오늘도 역시 길동무들의 도움을 받았다. 등산화의 딱딱한 부분을 두드려 부드럽게 해 주는가 하면, 소복하게 부은 발목에 냉온찜질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잠시 내어 주기도 다. 냉수와 온수가 모두 나오는 방을 먼저 차지한 순례자의 친절이었다. 사립 알베르게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특히나 길 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생각으로 서 있건 누구나 비슷하다. 배려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 더도 덜도 없이 자신이 갖고 있는 그릇의 크기만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소염진통제를 먹고 파스를 붙이는 일뿐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이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다음 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를 만난다면 나 역시 기꺼이 손을 내밀 것이다. 


오늘도 나의 이웃들은 국내에서 계속 응원을 보내주었다. 천주교 신자인 지인은 화살기도와 빛의 신비를 묵상하며 응원한다는 문자를, 40년 지기 선배는 주님이 빛 속에 걸어가는 나를 가호해 주실 거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뿐인가, 부산의 길동무는 숙소에 들어가면 수돗물로 무릎의 열을 식히고 무릎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얼음 마사지를 세 번 반복하라는 처방을 보냈다. 고마운 사람들. 이들이 있어 내 삶이 따뜻하다.       


산타 마리아 성당의 저녁미사를 참관한 후 묵주 팔찌를 선물로 받았다. 신부님의 축성기도까지 곁들여진 이 팔찌는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이웃에게 선물할 성물이 되었다.      


여수 형님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준 몇 명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나는 건강한 발로 잘 걷길 바란다는 의미로 ‘인진지’ 발가락 양말 한 켤레를 선물로 준비했다.

깨끗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와인으로 다시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형님은 우리의 즐거움이 혹여 다른 손님 식사에 불편을 끼칠까 봐 현지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랬더니 세상에나! 그들이 우리와 하나가 되어 생일 축하 건배를 해 준다. 스페인 사람들이 한국인의 정 문화에 스며든 순간이었다. 다리의 불편함은 내려놓고 마음껏 웃고 즐겼다.

        

* 걷기 6일 차 (에스떼야~로스 아르꼬스(Los Arcos)) 21.5km / 누적거리 13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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