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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25. 2024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

- 걷기 7일 차 -

오늘 걸을 거리가 길어 7시에 알베르게를 나섰다가 일몰과 일출을 동시에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무에 그리 급하다고 초승달이 떠나기도 전에 해님이 나오느라 저리도 서두를까. 그 덕에 불타는 하늘을 만났다. 불현듯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만났던 일몰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랬다. 열정의 투우사처럼 압도하는 붉음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땐 어둠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고 지금은 수정처럼 투명한 아침을 향해 오는 것이다.    

맑고 깨끗한 날씨 덕분인가 보다. 어제보다 컨디션이 좋아 안도한다. 오늘은 포도밭과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길을 걷는다. 내리쬐는 햇살은 부드럽고 길 상태도 나쁘지 않다. 얼마를 걸었을까, 쉬기 위해 길가에 앉아 양말을 벗는데 백발의 외국인 노부부가 지나간다.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올라, 부엔 까미노!’ 인사를 하는 순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눈을 뗄 수 없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부부를 바라보았다. 마주 보며 인사를 받아주던 부부의 웃음이 여유롭다. 오래 걸어 후줄근하지만 색깔을 맞춘 복장으로 두 손을 맞잡고 걷는 부부. 평온한 얼굴에 백발의 머리까지 닮았다.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 누구나 지향하는 노후의 모습일 텐데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흉내라도 내고 싶다. 다른 날 다른 곳이겠지만 저들처럼 남편과 함께 사부작거리며 걷고 싶다.      



오늘 걸음 역시 총체적 난국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기분 좋음이 정신을 지배한다며 애써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신발 목이 발목에 닿으면 통증으로 온몸이 오그라들지만 좋은 날씨로 가벼워진 지금의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       


와인으로 유명한 라 리오하(La rioja)주의 가없는 포도밭을 끼고 걸을 때였다. 일찍 출발해도 다른 이들보다 느린 내 걸음을 여수 형님이 어느새 따라붙었다. 그러더니 반가움과 놀라움이 섞인 내 목소리엔 반응도 없이 포도밭으로 사라졌다. 붙박이로 잠시 서 있었을 뿐인데 내 손바닥 위에는 모양이 찌그러진 포도송이가 얹혀 있다. 형님이 상품 가치가 떨어진 포도송이로 골라 땄으리라.

마른입 속에서 포도 알갱이가 터지자 단물이 쪽 나온다. 감로수가 이런 맛일 게다. 땀과 갈증과 통증을 끌어안고 걷던 길에 만난 포도는 다시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어린아이마냥 깔깔거리며 포도를 입 안에 넣는데 형님은 손 한 번 들어주곤 내 앞으로 먼저 길을 나선다. 나 역시 손을 흔들며 웃음을 날렸다. 이 형님 덕에 스페인의 따가운 햇살을 받고 농익은 포도 맛을 알 게 되었다.     

         

에브로(Ebro)강을 끼고 있는 로그로뇨는 작고 아담한 도시이다. 순례길 위에서는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지만 이곳에도 꽤 유명한 성당이 있다. '로그로뇨 대성당'이 바로 그곳이다. 잘 걷지 못하는 발걸음이지만 이 유명한 성당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문을 살짝 밀고 들어섰다. 생각보다 관람객이 많다. 천천히 움직이며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이곳저곳을 눈에 담느라 분주한데 유독 눈에 띄는 한 지점이 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묵직해 보이는 금고 앞에서 떠날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그리스도의 처형>이 보관된 금고였다. 진품이 눈앞에 있는데 못 보고 지나치면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았다. 안타까움에 두리번거리다 지나가는 수녀 한 분을 발견하고 쫓아가 애절한 눈빛으로 부탁을 드렸다. 꼭 보고 싶다고, 먼 곳에서 왔기에 지금이 아니면 이곳을 다시 찾을 기회가 없다고. 지성이면 감천이다. 한참을 생각하던 수녀님은 어딘가에서 묵직해 보이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 오셨다. 


<그리스도의 처형>을 눈앞에 놓고 마음껏 바라보았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수녀님은 함께 사진 찍고 싶다는 내 바람까지 기꺼이 들어주었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불자의 입에서 감사 인사가 저절로 나왔다. 진본 <그리스도의 처형>을 들고 수녀님과 사진을 찍는 영광이라니.    

   


  

순례길의 방향을 안내하는 로그로뇨의 가리비는 형태가 독특하다. 다른 지역의 그것과 달리 우리나라 복주머니같이 생겼다. 성 야곱이 이 주머니 속의 복을 조금 덜어 보내준 것일까, 나는 지금 매우 흡족한 기분으로 숙소를 향해 걷고 있다.  


오늘의 숙소는 도미토리 형태의 공립 알베르게이다. 내 옆 침대를 배정받은 이태리 모녀 중 엄마의 발은 상태가 나보다 더 심각했다. 부스럭 거리며 연고와 밴드를 찾아 건네니 감격한 얼굴로 인사를 한다. 난 저 마음을 알고 있다. 나도 계속 도움을 받으며 걷고 있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우리는 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응원을 보내며 한 곳을 향해 걷는다. 모두 정상의 컨디션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길 위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무엇을 지향하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 걷기 7일 차 (로스 아르꼬스~ 로그로뇨(Logrono)) 28.5km / 누적 거리 166.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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