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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27. 2024

어! 이 쎄~함은 뭐지?

- 걷기 8일 차 -

로그로뇨를 빠져나와 나헤라(Najera)를 향해 걷는다. 햇살은 투명하고 바람은 달콤하다. 오늘 같은 날씨엔 안 좋은 컨디션도 좋아질 것만 같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로그로뇨를 빠져나오는데 왼쪽 발목의 느낌이 심상치 않다.


어젯밤에 느낌이 이상해 파스를 붙이고 잤다. 그런데 파스가 제 역할을 못한 건지, 왼발이 오른발 역할까지 하느라 힘들어 그런 건지 전혀 감을 못 잡겠다. 분명한 건 까닭 모를 통증이 쓰나미처럼 밀려든다는 것이다. 결국 걷던 중간에 전 부장의 도움으로 발목에 테이핑을 했다. 등단한 시인이라는 이 분은 외모는 상남자이나 겪어보면 매우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순례자들은 그를 ‘까미노 아부지’라 부르며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다르다. 테이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이 땅에 닿으면 신음 소리부터 뱉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 위에서 나와 비슷한 고생을 했을까.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본 영화 『나의 산티아고』가 떠오른다. 성공한 연예인 ‘하페’가 ‘나는 누구인가’란 화두를 잡고 걷는 길. 수많은 시행착오와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끝내 완주하는 길. 그는 가장 먼저 얻은 교훈, ‘순례는 아프다’를 시작으로 점점 생각이 확장되고 사고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며 하는 주인공의 독백이 인상적이다.     

 

‘카미노는 모든 힘을 빼앗았다가 몇 배로 돌려준다. 이 길을 걸으면 누구나 이르건 늦건 밑바닥까지 흔들린다. 혼자 걷지 않으면 그 길은 비밀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내 안에서 커다란 종이 울렸다. 그 소리는 계속될 것이다. 물론 차츰 잦아들겠지만, 귀를 쫑긋 세우면 오래도록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픈 다리로 절뚝이면서도 페루의 영향을 받아 순금으로 도금을 했다는 ‘라바라테’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에 들렀다. 화려하기 그지없다. 성당도 그렇지만 이 지역은 지금까지 지나온 곳과 달리 주민들의 예술 감각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건물의 크기와 상관없이 소소한 출입문 손잡이의 디자인까지 예사롭지 않아 눈길이 간다.  

       

이젠 더 이상 나빠질 곳이 없기를 바란다. 왼쪽 발목이 잘 달래지면 주말을 즐기는 현지인처럼 나도 즐기고 싶다.

여유를 즐기는 이곳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오늘이 주말인 것을 잊고 걸었다. 우리나라에도 낚시꾼이 있고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이 많건만 이곳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여기 사람들은 영화라도 찍는 양 공원에서 여유와 근사함을 뿜어댄다. 마치 풍경의 일부처럼 자연에 녹아있다. 나도 바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고 나와 야외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향을 즐겼다. 현지인 코스프레를 하는 순간이었다.       


몸과 마음을 충전시키고 그라헤라호수(Pantano de La Grajera)를 지난다. 길가의 철조망에는 순례자들이 매어놓은 십자가와 메모들이 심란한 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이 바람에 어지럽다. 이 흔적들은 순례자의 발자취라서 함부로 손대지 않는가 보다. 세월이 흐르며 낡아 지저분해진 것도, 글씨가 흐려져 읽을 수 없는 것도 많아 눈에 거슬리지만 누구도 정리는 안 하는 것 같다.

  

와인으로 유명한 '라 리오하주' 답게 걷다가 커다란 양조장을 만났다. 울타리보다 더 높고 큰 와인병과 순례자 형상의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그 앞에서 순례자 조형물과 함께 걷는 듯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다시 걷는다. 오늘 코스는 지루하다. 길가 양쪽으로 포도밭이 펼쳐질 땐 포도 따 먹는 재미에 빠져 아픈 것을 순간순간 잊지만, 그 길이 끝나면 통증이 되살아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통증 때문인가 그늘 한 자락 없이 황량한 길이 막막하다. 거기에 더해 다른 날보다 자전거 순례자가 많이 지나가며 먼지를 뿌려댄다. 무심코 걷는 길에 이들이 나타나면 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난 먼지를 홀딱 뒤집어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하게 걷는다.


나는 오늘도 함께 출발했던 순례자들보다 늦게 알베르게에 도착해 통증 오일로 아픈 부위를 마사지했다. 문검지 쌤의 마음이 담긴 오일은 새끼발가락, 발바닥, 발목, 무릎으로 이어지는 통증을 가라앉히지는 못 하지만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붉은색의 절벽 아래 터를 잡은 나헤라의 시가지 사이로 나레리야강이 흐르고, 해님은 서산으로 넘어가는 평화로운 시간이다.      


* 걷기 8일 차 (로그로뇨~ 나헤라(Najera)) 29.5km / 누적거리 19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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