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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29. 2024

기분이 좋아 빨리 좋아질 거예요

- 걷기 9일 차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로 출발하기 전에 국내 병원에서 처방받아 갖고 간 소염진통제를 먹고 테이핑을 하고 다시 압박붕대를 했건만 극심한 왼쪽 발목 통증으로 걷는 게 고통스럽다. 그동안 저지른 나쁜 일들이 고통으로 오는 걸까 하루하루가 통증으로 진이 빠진다. 이 고통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제니퍼하고 약국을 갔다. 스페인의 약국은 우리나라와 시스템이 달랐다. 내 체중을 확인한 후 진통제를 처방한다. 엄청 큰 알약의 일반 진통제와 소염 진통제를 함께 먹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은 정말 간사하다.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리다가 안경테 코너에서 마음에 쏙 드는 안경테를 발견한 것이다. 가격도 국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렴했다. 주저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바로 구입했더니, “기분이 좋아 빨리 좋아질 거예요.” 약사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마주 보고 고맙다며 웃었다.     

 

순례길의 함정은 흙길에 있다.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이 길은 고운 흙길이 아니라 날카롭고 작은 돌멩이가 땅속에 박혀서, 또 더러는 길 위를 나뒹굴고 있다. 그러니 나 같은 순례자에겐 참으로 야속한 길이 아닐 수 없다. 발에 전달되는 거친 촉감이 그대로 통증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도밭으로 이어진 주변의 경치는 신비롭고 아름답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은 통증으로 몸서리치지만 경치의 아름다움은 큰 위로가 된다. 

      

간간이 한국 사람도 만난다. 사춘기에 접어든 초등학교 5학년 딸, 중학교 2학년 아들과 함께 걷는 젊은 엄마는 아이들을 한 학기 쉬게 하고 이곳에 왔단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패스한 24살 청년은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비행기를 탔고, 지금까지 계속 여행 중이란다. 이렇게 트인 엄마와 생각이 건전한 한국의 젊은이처럼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열린 마음으로 길 위에 있다. 그들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사람을 모이게 한다. 너나없이 하나가 된다. 함께 나의 발 상태를 걱정해 주고 한마음으로 응원하며 같은 목소리로 조언을 한다. 차로 이동하는 게 좋겠다고. 

얼음찜질을 열심히 해 보고 내일 아침에 최종 결정하련다. 모두모두 감사하다. 사람 사는 세상임이 전해져 마음이 뜨거워진다. 

     

오늘의 목적지는 지평선을 향해 끝없이 걸어야 만날 수 있는 도시이다. 보리밭과 밀밭 사이로 먼지가 푸석이는 메마른 길을 걸었다. 지쳐 숨이 멎을 것 같을 때 비로소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했다. 이곳의 산토 도밍고 대성당은 ‘수탉과 암탉의 기적’ 전설을 품고 있다.     

 

‘수도사가 되고 싶었던 잘 생긴 청년이 어머니를 모시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중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모자가 묵던 숙소 주인의 딸은 청년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고백을 한다. 그러나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 청년은 그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녀는 앙심을 품었다. 성당의 성합을 청년의 가방에 몰래 넣고 도둑으로 몰아간 것이다. 판사는 청년을 교수형으로 처벌했다. 청년의 어머니는 슬픈 마음으로 아들을 마음속에 품고 산티아고까지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사형당한 언덕에 들렀다가 놀라운 일을 보게 된다. 아들이 한 달이 넘도록 교수대에 매달린 채 살아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판사에게 달려가 아들이 살아 있으니 풀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판사는 “당신 아들이 살아 있으면 내 앞에 있는 삶은 닭도 살아나라지.”라고 말했다. 순간 식탁 위의 삶은 닭이 살아나 푸드덕 거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마을에서는 대성당에 암수 한 쌍의 닭을 키우며 청년을 기렸다' 


이 전설로 순례길에서 더욱 유명한 도시가 된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이곳에서는 12세기 건물인 국영호텔 ‘파라도레스’에서 머문다. 이 국영호텔은 스페인 정부가 대성당을 리모델링해 만들었다는데 품위 있고 깨끗하며 훌륭하다.      

       

역사를 품고 있는 고풍스러운 숙소에서 얼음으로 발목을 찜질한다. 제니퍼가 호텔 주방에 내 사정을 말하고 비닐팩에 얼음을 채워다 주었다. 감사하다고 말은 했지만 너무 형식적인 인사 같아 미안하다.  

발목이 아픈 이후 걷기를 포기할 것도 아니면서 자꾸 마음이 약해진다. 그때마다 길 위의 친절과 이웃들의 격려를 잊지 않겠다며 마음을 다잡는다.      


* 걷기 9일 차 (나헤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21.5km / 누적거리 217.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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