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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30. 2024

병원놀이를 하다

- 걷기 10일 차 -

발목이 더 심해져 현지 병원을 갔는데 진료비만 130유로란다. 깜짝 놀랐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0만 원이 넘는 돈을 단지 의사를 만나는 비용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진료가 필요한 순례자이다. 병원비가 더 비싸다 할지라도 의사를 만나야 한다. 


스페인의 병원은 진료비를 직접 수납하지 않는다. 접수창구에서 고지서를 발급받아 은행에 가서 납부한다. 다행히 제니퍼가 병원을 동행했다. 이 모든 절차 처리는 물론이려니와 병원 곳곳을 휠체어로 이동시켜 주었다.      

의사는 친절했다. X-레이 실도 직접 데리고 가고, 순례자라고 소염진통제는 돈도 안 받고 진료실에서 직접 주었다. 병원을 나온 후 제니퍼에게 들었다. 의사가 동행하지 않았다면 X-레이를 찍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었을 거라고.  

스페인의 병원은 외국인에게는 진료비를 비싸게 받지만, 자국민은 무료 진료란다. 의료 복지가 확실하고 과잉 진료도 없다고 한다. 하긴 약국에서 소염진통제를 살 때도 내 체중을 확인하고 약을 주었으니 과잉 진료가 없는 건 그때 이미 경험했다. 그러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생각이 다르다는 말처럼 인간은 간사한 동물임에 틀림이 없나 보다. 절박한 심정으로 진료실을 들어갔지만, 의사의 진단이 발목 염증으로 나오니 놀부 심보가 안에서 꿈틀거렸다. 돈 생각이 났던 것이다.     



오늘의 목적지 ‘벨로라도’까지는 걸을 수 있는 다리 상태가 아니어서 택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버스를 오르내리기도, 발걸음을 떼기도 쉽지 않은 까닭에 20분도 채 안 걸린다는 거리를 30유로 거금을 들여 이동하려니 돈이 아깝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핑계로 남들이 안 타본 택시도 타 보는 거지.     


산토 도밍고에는 택시가 딱 두 대 있단다. 그나마 한 대는 휴가 중이어서 운행 중인 한 대를 기다리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예측할 수 없다고 했다. 실망스러움을 막 뱉어내려던 참이었다. 휴가 중인 택시 기사가 아픈 부인을 태우고 병원에 온 것이다. 제니퍼는 손쉽게 택시 탄 것을 행운이라고 했다.      


160유로짜리 특별한 하루를 보냈다. 순례길에서 스페인 병원도 가보고 택시도 타 본 사람 있음 나와 보시라. 나는 발목 염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귀족 놀이를 계속할 참이다. 이 또한 ‘하람’이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제니퍼의 선한 영향력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스스로 정답을 만들어버렸다.     


제니퍼가 복권 한 장을 내밀었다. 은행에 병원비를 내러 갔다가 연결된 번호의 복권을 세 장 샀다고 했다. 나머지 두 장은 라푼젤 언니와 자신이 한 장씩 갖겠단다. 셋 중 누구든 당첨자가 나온다면 셋이 다시 스페인에서 만나자는 제안까지 곁들였다. 오랜만에 깔깔거리며 유쾌하게 웃었다. 이 멋있는 여자와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복권 당첨 때문이 아니라 인연의 끈을 붙잡아 내 이웃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언제든 한국으로 나올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주었다.      


오늘 묶는 알베르게가 폭립 맛 집이란 말을 들었다. 맛 집에 들어와 굳이 순례자 메뉴를 먹으러 나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라푼젤 언니와 알베르게의 레스토랑에서 폭립과 맥주를 주문하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무심코 국내 지인들이 보낸 응원의 글을 살피다 그림 그리는 윤 쌤의 글에서 빵 터졌다. 

울릉도를 도보 일주하다가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며 주인 할머니께 여쭈었단다.      


“할머니 ‘천부’까지 걸어가는 중인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이 사람아, 아이스크림 사 먹을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버스를 타지 왜 걸어가시나?”    

  

한참 바라보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씀하시더란다. 내게도 무리하지 말고 자동차로 움직이라는 권유를 자신이 겪었던 상황을 곁들여 메시지로 보내온 것이다.  

유쾌했다. 비록 스스로 걷는 게 어려워 쩔쩔매지만, 나를 걱정해 주는 이웃들의 메시지로 기분이 좋아졌다. 더구나 나는 복권 때문에 스페인을 다시 와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 아닌가. 저녁 식사를 위해 언니와 둘이 앉아 당첨금을 받으러 올 땐 ‘깔끔하고 세련되게 입고 오자’며 시시덕거린다.   


폭립과 맥주가 환상의 콤비를 이룬다. 순례길 위에서 마시는 유럽의 맥주는 항상 느끼는 거지만 왜 이리 맛있단 말인가.      


* 걷기 10일 차 (산토 도밍고~ 벨로라도(Belorado)) 23km / 누적거리 240.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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