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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Jan 31. 2024

나는 하람이다

- 걷기 11일 차 - 

차로 이동한다. 순례자들은 이것을 ‘점프한다’고 말한다. 오후부터 비 올 확률이 50%라는데 비록 차를 타고 이동하긴 하지만 바람이 차가우니 을씨년스럽다.

삭막한 길에 날씨마저 꿀꿀하니 기분이 가라앉는다. 내가 좋아서 떠난 길임에도 불구하고 컨디션 때문에 위축이 되는가 보다. 몸이 움직여주지 않으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신체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만, 걸으러 왔는데 발이 고장 나니 심란하다. 그러나 나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적응하며 즐길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변하지 않는 건 내가 ‘하람’이라는 사실이다.      


차로 움직였더니 목적지인 ‘아헤스’에 빨리 도착했다. 알베르게 주인은 아주 호인이다. 다리 아픈 순례자라고 숙소에 들어서기 바쁘게 기분이 나아질 거라며 마늘빵수프와 닭고기 요리를 먹을 수 있도록 차려준다. 선물이라고 했다. 수프에는 숟가락을, 닭 요리에는 포크와 나무젓가락을 함께 놓아준 배려가 고맙다. 한국인이라고 젓가락까지 챙겼구나 싶어 마음이 훈훈해진다. 따끈한 수프가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 녹이는 순간이다. 동서양 할 것 없이 세상 어디에나 인정은 살아 있다.      


남자 외국인 한 명이 지친 발걸음으로 들어와 식사를 시키는데 옆자리에 놓인 배낭으로 눈이 간다. 배낭에 매달린 광대 가면이 예사롭지 않다. 순례길을 걸으며 피에로 마스크라니. 궁금증을 못 견뎌 그에게 물었다. 핼러윈데이를 즐기기 위한 소품이란다. 오! 멋짐 폭발이다. 핼러윈데이는 아이들의 축제인 줄 알았더니 어른도 즐기나 보다.     

 

내가 아는 핼러윈데이는 아이들이 유령이나 마녀 같은 캐릭터 분장으로 ‘잭 오 랜턴’이라는 이름의 호박 등이 켜진 집을 찾아가 사탕을 받는 풍습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학원 행사로 진행되던 핼러윈데이 축제를 위해 드라큘라 마스크와 검정 망토 분장을 해 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문화에 빠져 나도 어떤 기분일지 즐겨보고 싶어졌다. 이곳이 아니면 내가 또 어디서 핼러윈데이를 즐길 수 있겠는가.    

  

알베르게 주인의 배려는 요리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1인용 침대를 조건 없이 배정해 주었다. 거개의 사립 알베르게는 공용 도미토리와 함께 방 하나에 1인용 침대를 두 개 놓고 돈을 더 받는다. 이곳도 그런 알베르게인 것 같은데 도미토리와 같은 값으로 1인용 침대를 받았다. 오늘은 행운이 넝쿨째 들어온 날이라고 기억될 것 같다.    

   

세상은 살만하고 좋은 사람도 넘쳐난다. 이튿날 이른 아침, 새벽길을 떠나는 나를 배웅하며  알베르게 주인은 눈물을 보였다. 서운하다고 했다. 나 역시 콧날이 찡해져 괜히 헛기침을 해대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듯 사람 냄새나는 사람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있다.    


길 위의 하루하루가 진중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중한 날들이 사라진다. 순례자들과의 관계나 현지인의 배려에서 인간다움을 보고 느끼며 마음에 새겨둔다. 그렇다고 모두가 좋은 사람이란 의미는 아니다. 개중에는 어이없는 짓을 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정나미 떨어지게 하는 사람도 있다. 지구별 어딘들 그렇지 않겠는가. 이 길 역시 다양한 사람이 헤쳐 모이는 곳이니 별별 사람이 다 있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며 알베르게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알게 되었다. 술판(?)을 벌이지 말 것과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한때 한국 사람들이 알베르게에서 끼리끼리 모여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소란스럽게 행동했었단다. 그때 이후 순례길의 알베르게 주인들이 가능하면 한국인은 받지 말자고 의견을 모았단다. 어이가 없었다. 왜 이 길을 걷는가. 종교인이든 아니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찰의 시간을 갖기 위해 이 먼 길을 찾아온 것이 아닌가. 특별한 길 떠남임을 잊으면 안 된다. 나라 망신까지 시킬 일은 더구나 아니다.    

     

또 한 가지는 소지품 관리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순례길을 걸으러 온 한국인 중 한 명이 아무 생각 없이 벗은 옷과 지갑이 든 작은 가방을 샤워부스 밖에 두고 몸을 씻었단다. 그런데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가방만 감쪽같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단다. 당연히 난리가 났지만 끝내 가방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모든 비용을 고스란히 잃어버린 그 한국인은 걷기를 포기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단다. 얼마나 아깝고 야속한 일인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 세상은 꼬인 실타래처럼 풀기가 어렵다. 잘 사는 게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래서 마음공부가 필요하다. 나 역시 끊임없이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내 속의 나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일렁이는 강물처럼 흔들릴 때가 많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인간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믿고 싶다. 처한 상황에 순응하며 나를 잘 다스려야 한다. 


* 걷기 11일 차 (벨로라도~ 아헤스(Ages)) 28km / 누적거리 268.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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