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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Feb 12. 2024

길은 순탄하고 고요하다

- 순례길 18일 차 -

예전에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엄청난 일몰을 만나 감탄한 적이 있었다. 소금사막은 우리가 아는 사막에 모래 대신 소금이 덮여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옛날 옛적에 지각변동으로 바닷속에 있던 땅이 솟아올라 안데스산맥을 형성했고, 지금의 우유니 사막이 있던 곳은 거대한 호수가 되었단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가 적고 건조한 기후가 이어지자 물이 증발하고 소금 결정만 남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없는 땅이 소금사막으로 변모한 것이다.     


비가 내리면 빗물이 하늘에 비춰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금사막을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이라고 부른다. 

그곳에서 만났던 일몰은 환희였다. 그런데 ‘테라디요스’를 떠나며 우유니 소금사막의 일몰같이 굉장한 일출을 만났다. 이 두 곳은 각기 다른 일몰과 일출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일반적인 세상의 풍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만났던 해넘이와 해돋이는 비교의 수준이 못되었다. 오늘의 일출은 눈을 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오묘하고 신비로웠다. 다리 아픔도 잊은 채 환호성을 질렀다. 나약해진 내게 자연이 보내준 위안이자 선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린 날씨가 을씨년스럽다. 몸도 마음도 점점 차가워지는데 구름 속에 숨은 해님은 얼굴 내밀 생각이 아예 없나 보다.    

  

길은 순탄하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참새 떼가 무리 지어 움직이는 시골길의 평화는 내 고향 마을의 신작로 같다. 나이가 들고 보니 더욱 그렇다. 아스라한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자락은 치유의 손길이다. 마음속 생각 주머니에서 어린 날의 기억을 조금 꺼내 누군가와 마주 앉아 두런거릴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지금 쓸쓸하고 외롭다. 이런 분위기는 컨디션이 난조를 몰고 오기에 적합해 기분 관리가 필요하다.      


사아군을 지나는데 화려한 ‘산 베니또(San Benito) 아치’가 눈에 들어온다. 사아군이 수도원 도시였음을 알게 하는 이 아치는 중세의 산 베니토 왕립 수도원이 만든 건축물이다. 당시의 수도원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크고 화려하다. 그러나 예전의 수도원 건물은 번성했던 당시의 영광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례길 위에서는 나도 모르게 생각이 많아진다. 길의 역사를 알아갈수록, 문화에 젖어들수록, 마을을 거쳐 갈수록 다양하게 많은 생각이 들어온다. 사아군에서도 그렇다. 수도원 도시였음을 알게 된 이후 마음이 심란하다. 예전의 영광을 간직한 산 베니또 아치는 묵묵히 말이 없는데 지나가는 길손은 그것을 바라보는 눈길에 심란함을 담았다. 세월의 무상함을 또 느낀다.    

   

‘엘 부르고 라네로’는 작은 마을이다. 우중충한 날씨에 도착했건만 오늘 머물 기부제 알베르게는 난방이 안 되는 곳이었다. 알베르게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차가운 한기가 내 몸과 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날씨에 난방이 안 되는 알베르게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기운이 빠진다. 그러나 불평을 할 수는 없다. 이 작은 마을에서 확실하게 머물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한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기분까지 우중충한 마당에 머물 곳이 마땅찮아 찾아다닌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좋게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시킨다. 하지만 숙박 환경이 지금까지 중에서 최악이다. 창틀에는 죽은 파리들이 널브러져 있고 샤워실은 빨지 않은 걸레를 오랫동안 묵힌 것 같은 퀴퀴한 냄새를 뿜어댄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원봉사자까지 퉁명스러우니 이보다 더 열악할 수 있을까. 그렇거나 말거나 순례자들은 계속 들어온다. 이나마도 확보되어 감사하다고 하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짐 정리를 대충 하고 추위를 떨구려고 침낭 속으로 파고드는데 난데없이 노랫소리와 박수소리가 요란하다. 주위의 웅성거림이 예사롭지 않아 옷을 껴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외국인 순례자 중에 가수가 한 명 있어 그녀의 노래에 다른 순례자들이 반응하며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추우니 나는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주섬주섬 덧옷을 입고 지갑을 챙겨 라푼젤 언니와 마트로 향했다.      


이런 날씨엔 뜨끈한 국물이 최고이다. 밀가루와 야채 몇 가지를 사 갖고 돌아와 수제비를 끓였다. 주위의 몇몇 사람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데 연신 찬사와 엄지를 올린다. 기분이 좋아 남몰래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무렴! 경력 30년이 넘은 주부의 손맛을 니들이 알겠어? 이런 날씨엔 수제비를 따라올 메뉴가 없지.’ 

      

깊어가는 가을이 바람에 쓸리는 가랑잎처럼 흔들린다. 쓸쓸한 하루가 저물어 간다.      


* 순례길 18일 차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  

29km / 누적거리 435.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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