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람 Feb 14. 2024

낯선 땅에서 부황을 뜨고 사혈을
하다니

- 걷기 19일 차 -

슬리퍼를 신고 움직인 지 일주일이 되었다. 가볍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 바람에 끈을 꼭 묶으면 통증이 느껴지는 트레킹화는 배낭에 매달려 공중그네를 타며 여유를 부린다.


여러 날을 차로 이동하다 보니 전 부장과 수다 떠는 게 익숙해졌다. 전 부장은 양파 껍질 벗기듯이 알면 알수록 인간적인 면이 더 튀어나오는 사람이다. 

여러 번 이 길을 걸어본 사람답게 맛있는 커피를 제공하는 Bar와 맛 집을 꿰고 있다는 것도 도움이 되고, 방문 지역마다 보이는 면면을 설명 듣는 재미도 있다. 마치 내가 개인 가이드와 함께 여행하는 것 같다. 걷지 않고 계속 차로 이동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케미도 잘 맞는다. 다리는 비록 병이 나 걸을 수 없으나 입은 수다 떠는데 지장이 없으니 별의별 얘기를 다 나누는 것이다.    

  

오늘 들어간 바는 젊은 직원이 친절했다. 에스프레소와 뜨거운 물을 함께 주며 커피 농도를 조절하라는 말까지 잊지 않고 덧붙인다. 동양인에게 혹은 순례자에게 보인 배려라고 여기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서비스이다.  

경유 마을에서 마시는 커피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이 맛에 빠져 지내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리울 것만 같다.      

오늘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이다. 햇살이 아름다워 탄성이 절로 나오고 기분이 좋아진다. 기온은 떨어졌으나 날씨가 맑고 바람도 잔잔하다. 

‘만시야 데 라스 무라스’에 들어서니 마을이 평화롭게 느껴진다. 사방으로 보이는 성당의 종탑도 이런 내 느낌에 한몫을 한다. 스페인은 어딜 가나 성당의 종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어제는 외딴 길 위의 작은 성당에서 깎아지른 듯이 까마득한 높이의 종탑을 보았다. ‘종지기가 오르내리느라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만큼 독특했는데, 오늘은 눈에 띄는 종탑마다 편안해 보인다. 

18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그라시아 성모 성소’는 종탑보다는 마을의 수호성인인 '감사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어 눈에 더 오래 머물던 곳이다. 

     

길을 걷는 즐거움 중에는 맛난 것을 먹는 재미도 들어간다. 오늘 점심은 김 대리가 알려준 고기 맛 집에서 먹기 위해 찾아갔다. 번화가에서 좀 떨어진 한갓진 곳이었다. 한국인의 입맛에 안성맞춤인 고기 요리가 푸짐하게 나왔다. 육류를 과히 좋아하지 않아 많이 먹지 않는 내 입에도 맛있다고 느껴지는 걸 보면 요리사의 손맛이 특별한 집인가 보다. 마을을 지나며 식사의 대부분은 순례자 메뉴를 시키지만, 이렇게 맛 집을 소개받거나 별미가 있는 곳에선 가능하면 그것 먹어보기를 놓치지 않는다. 오늘 먹은 고기 요리도 그랬다. 이 레스토랑이 아니면 어디서도 이 맛의 음식은 먹을 수 없다. 그러니 어찌 이 시간이 즐겁지 않겠는가.       


'만시야 데 라스 무라스'의 알베르게는 조금 특별한 곳이다. 다리 아픈 순례자가 들어오면 봉사자가 와서 무료로 마사지를 해 준다는 게 아닌가. 마치 나를 위한 서비스 같았다. 김 대리의 주선으로 집시 분위기의 여성에게 아픈 부위를 마사지받았다. 내 다리 상태를 알게 된 봉사자는 약간의 돈을 내면 부황을 뜨고 사혈까지 해주겠단다. 

걸어야 할 발이 고장 난 지금의 내 처지는 절박하다. 그렇기에 다리가 좋아진다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하지만 부황과 사혈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내가 처음 만난 서양인에게 이 치료를 받으려니 망설임과 긴장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눈치 빠른 알베르게 주인이 재빨리 일어나 벽에 걸린 커다란 톱을 꺼내 들었다. 다리를 잘라서 다시 붙여야 한다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준다. 긴장한 내 표정을 본 것 같았다. 

     

한국인인 내가 스페인의 한적한 길 위에서 근본을 알 수 없는 서양 여성으로부터 동양의술을 시술받았다. 부황을 뜨고 사혈을 한 것이다.  아직도 왼발은 모스 부호 같은 통증으로 끊임없이 이상한 신호를 보낸다. 그만큼 했으면 놓아 줄만도 하건만, 검지 님 표현대로 관심받고 싶은 내 다리는 사랑이 필요한가 보다.     

 

나는 하루라도 더 걷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건강한 다리로 안 가본 땅을 걸어보고 싶고 모르던 산과 들판을 알고 싶다. 조금 고될지라도 그 과정을 즐기고 싶고 살아있음을 만끽하고 싶다. 그렇게 되려면 내 몸의 변화를 좀 더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신체 나이가 빠르게 달려감을 잊지 말고 과한 욕심은 부리지 말아야겠다. 건강한 노후가 성공한 인생임을 잊지 않으련다. 행복한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      


오늘, 특별한 날이다.      


* 걷기 19일 차(엘 부르고 라네로 ~ 만시야 데 라스 무라스(Mansilla de las Mulas)) 19km / 누적거리 454.5km

작가의 이전글 길은 순탄하고 고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