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0년 전에는 로마의 군사도시였다가 서고트족과 이슬람의 지배를 거쳐 크리스트교의 메카가 된 ‘레온’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로마제국 점령시기 이후 1세기에 만들어진 레온은 역사 유적이 가득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이기도 하다.
레온 왕국의 수도이자 산티아고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이곳에 가면 꼭 보려 했던 건축물이 있다. 가우디 작품인 ‘까사 데 보티네스 저택’과 ‘레온 대성당’이 그것이다.
까사 데 보티네스 저택은 담백하고 중후했다. 빠르게 걷지 못하는 발걸음이지만 부지런히 걸어 건물을 마주한 순간, 가장 먼저 출입문 위의 장식과 그 위의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답게 꼬인 철제 출입문과 담장도 인상적이었다. 가우디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등 선대가 모두 주물을 다루는 사람이었다더니 가우디 역시 그 핏줄임에 틀림이 없었다. 쇠 다루는 기술이 보통 이상임을 현장에 와 보니 알겠다. 마치 엿가락을 구부려놓은 듯 정교하고 멋져 눈을 뗄 수가 없다.
출입문 아랫부분과 담장 윗부분을 뾰족하게 처리한 것은 외부인 출입 금지를 선언하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부잣집의 높디높은 울타리 위에 둘둘 말아 둘러쳐진 철조망이 연상되었다. 날카롭게 박아놓은 초록색의 유리 조각도 떠올랐다. 대저택의 뾰족한 끝마무리를 장식의 영역으로 받아들이지 못함은 내 기억 저편에 자리 잡은 추억 주머니 속 어느 한 조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하 1층부터 시작해 한 층 한 층을 살핀다. 건축에 대한 상식이 풍부했다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느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이다. 건축에 관심이 많은 자식을 둔 엄마였기에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흡수하고 이해하려 했으나 역부족인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이 소중하다. 내 스타일로 해석하며 가우디를 만나 즐기는데 왜 이리 시간은 빨리 지나갈까.
볼 것이 많은 도시의 하루는 너무 짧다. 까사 데 보티네스 저택을 나와 레온 대성당으로 향한다. 부르고스 대성당, 산티아고 대성당과 함께 순례길의 3대 대성당으로 꼽히는 레온 대성당은 13세기 초에 지어지고 14세기 초에 준공되었다.
갑자기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떠오른다. 레온 대성당 중앙 파사드 꼭대기의 화려한 석조 조각과 양쪽 앞으로 솟아난 이중 아치는 화재로 세계인을 놀라게 했던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모양이나 분위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레온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석양에 비치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빛으로 유명하다. 어떤 빛일지 상상이 되지 않아 기대와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딱 지금 시간이면 석양빛이 비치기 시작할 것이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보티네스 저택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다리 상태로 걷기에 시간이 걸려 조바심이 난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며 빛나는 석양빛의 신비를 현장에서 느끼고 싶은데 몸이 빠르게 대처하지 못해 마음만 바쁘다.
성당 안은 어두침침하다. 익숙해질 때까지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본다. 어둑어둑한 실내로 들어오는 빛이 멀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분위기는 느낄 수 있다. 내가 이곳에 서 있다니! 애써 진정하며 발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어찌 이리도 화려하단 말인가. 천상의 세계를 옮겨다 놓은 듯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각양각색의 빛의 조화가 신비롭다.
120여 개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과 둥근 창 57개와 장미 문양 창문 3개 등 아주 많은 창문들이 모두 13세기에 제작된 진품의 유리 예술 작품이란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내가 이렇게 가슴 벅찬데 신자라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마음이 고요하다. 빛으로 뿌려지는 신의 은총을 온몸으로 받는다. 다리가 점점 더 좋아질 거란 희망으로 마음까지 부풀어 오른다.
이곳에서는 성가대석도 자세히 보아야 한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이 성가대석은 정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보이는 모든 것이 예술품이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 성당은 완공까지 400년이 걸렸다고 한다. 가우디의 작품들은 대개 몇 백 년에 걸쳐 완공되면서 예술품으로 승화한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나는 감탄 말고는 할 것이 없다.
오늘은 ‘파라도르’에서 묵는 호사를 누린다.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의 병원을 호텔로 개조한 이곳은 매우 고풍스럽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파라도르는 오래된 고성이나 수도원 등도 호텔로 개조해 운영하는 국영호텔 체인이다.
여유롭게 로비를 어슬렁거린다. 사자 문양이 그려져 있는 목 가구를 눈에 잘 띄도록 배치한 것이 시선을 끈다. 레온 왕국의 문장이 사자인데 관련된 가구일까 하는 생각이 찰나적으로 스쳤다. 가까이 다가갔다. 가구 위 벽에는 만지지 말라고 ‘SE RUEGA NO TOCAR / PLEASE DON'T TOUCH’가 적혀 있다. 중요한 가구임에 틀림이 없나 보다.
오늘은 좀 많이 걸었더니 발목 통증이 다시 심해졌다. 큰 도시에 왔을 때 병원을 다시 가야 하는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성 야고보에게만 고난의 길이었던 게 아니라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내게도 고난의 길이다. 그 바람에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표하는 산이시도르 교회 역시 걸작품이라는데 컨디션의 난조와 시간 부족으로 둘러볼 수 없었다. 애석하다.
* 걷기 20일 차 (만시야 데 라스 무라스~ 레온(Leon)) 18.5km / 누적거리 47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