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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Feb 24. 2024

돈 엘리야스 발리나 샴페드로 신부님, 감사해요

- 걷기 27일 차 - 

‘베가 데 발까르쎄’에서의 출발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밤새 내리던 비가 얌전해진 만큼 안도감이 컸고, 건너 마을에 내린 눈의 양만 걱정했다. 그런데 ‘오 세브레이로’가 가까워질수록 진눈깨비가 내리더니 함박눈으로 변해 길에 쌓이기 시작했다.   

   

갈리시아 지방의 첫 마을인 ‘오 세브레이로’에 들어서며 만났던 눈은 나의 도착을 축하라도 하는 듯이 아직도 군무를 멈추지 않는다. 겨울 왕국인 동시에 아름다운 동화 마을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편하게 걷지 못하는 내가 내일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마녀의 심술로 얼어붙은 이곳에 착한 요정이 나타나 추위도 눈도 없애주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에 빠진다. 순간 주위가 웅성웅성 소란스럽다. 지역 방송국에서 갑자기 내린 때 이른 폭설을 취재하러 나왔단다. 눈발이 예사롭지 않음은 분명한가 보다.       



이 마을을 지나는 순례자는 산타 마리아 아 레알(Santa Maria A Real) 성당과 중세 오두막 박물관을 눈여겨볼 일이다. 

지금의 산타 마리아 아 레알 성당은 1971년에 지어졌다. 1962년에 발견된 스페인 초기 아스투리아스 왕국 양식의 로마시대 건축물 기초 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성당은 순례길 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성당 안에는 담백하게 십자가 하나만 걸려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베네딕토 성인의 뼈가 있다는 설과 함께 또 다른 기적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독실하지만 가난한 소작농 한 명이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내리는데도 미사에 참석하러 성당을 찾았다. 오만한 사제는 멸시의 눈초리를 숨기지 않으며 농부에게 빵과 포도주를 건넸고, 그 순간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했다. 성당 안의 마리아상도 이 기적적인 광경에 고개를 기울였다.’   

이 전설을 듣게 된 이사벨 여왕이 1468년 산티아고 순례 중 이곳에 들려 11세기에 만들어진 ‘최후의 만찬’이란 이름의 성배를 기증했다. 지금도 성당 안 가장 눈에 잘 띄는 장소에는 성배 ‘최후의 만찬’이 놓여 있다. 

불현듯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이 떠오른다.  '댄 브라운'의 작품 『다빈치 코드』처럼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어온 성배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음악극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성배를 한동안 바라보다 눈을 돌리니 세계 각 나라의 언어로 쓴 성경이 전시되어 있다. 혹시나 하고 살피다가 한글 성경책을 발견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까닭 모를 뭉클함에 어깨를 으쓱인다.

각 나라의 언어로 된 순례자의 기도문 속에는 한국어로 된 순례자를 위한 축복 기도문도 있다. 나는 불교와 더 친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콧날이 알싸하다.      

 

<순례자를 위한 축복 기도>   

사랑이 당신 여정에 희망의 빛이 되게 하며, 평화가 당신 마음에 가득하소서.

선하심이 당신 인생의 길잡이가 되고, 당신의 믿음이 삶의 신비에서 당신을 굳세게 하소서.

신이 당신의 목표에 도달하는 때에, 사랑이 당신을 영원히 감싸게 하소서.

행복하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세요.     


산타 마리아 아 레알 성당에는 ‘돈 엘리야스 발리나 샴페드로(1929~1989)’ 사제가 잠들어 계신다. 이 분은 순례길을 연구하고 까미노길의 상징인 ‘노란 화살표’를 처음 고안한 분이다. 그런데 어쩌나! 성당 옆 마당에서 엘리아스 사제의 흉상이 눈을 맞아 을씨년스럽다. 우리는 평화의 소녀상에 모자도 씌워주고 목도리도 둘러주는데 이곳 사람들은 우리와 정서가 다른가 보다.      



중세 오두막 박물관은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박물관은 갈리시아 지방 전통 주거인 파요사(Palloza)가 원추형의 호밀짚 지붕을 얹고 있는 형태였다. 파요사는 눈의 무게와 바람을 견뎌낼 수 있도록 호밀을 엮어 덮은 지붕이다. 초가지붕에 익숙한 내게는 파요사가 정답다. 스페인의 민속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구조물이라는데 내 다리 상태가 폭설을 뚫고 방문할 만큼이 못 돼 안타깝다.     

 

오늘 머무는 알베르게는 갈리시아 정부가 운영하는 공립 알베르게임에도 불구하고 엄동설한 날씨에 난방을 안 해줘 매우 춥다. 특별한 성당과 독보적인 사제가 계셨던 지역인데 순례자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얼마나 좋았을까.    

  

* 걷기 27일 차 (베가 데 발까르쎄~ 오 세브레이로(O’Cebreiro)) 13.5km / 누적거리 634.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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