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부터 확인한다. ‘오 세브레이로’는 날씨 변덕이 심하기로 소문난 곳이라 어떤 기상상태인지 확인이 중요하다. 다행히 눈은 그쳤으나 내린 눈의 양이 많아 발이 푹푹 빠진다. 발목이 아파 쩔쩔매면서도 기념사진을 찍고, 출발을 위해 눈길을 나선다,
질펀했던 땅이 얼고 녹기를 반복했는지 지면이 울퉁불퉁하다. 그러나 눈이 쌓여 땅의 상태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스틱을 사용해 천천히 걷지만 발걸음을 옮기다 삐끗하면 전율이 온몸으로 전달돼 소름이 끼친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오 세브레이로를 떠나 ‘뽀이오 언덕’을 지나며 ‘산 로께 성인’의 동상을 만났다. 성인은 바람을 뚫고 꿋꿋이 걸어가는 순례자의 모습으로 밤새 내린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와 다름이 없다.
차도와 인접한 순례길은 밤새 눈에 덮여버렸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숲인지 알 수 없어 순례자들은 녹아 있는 찻길 가를 걷고 있다. 눈길에 안개까지 짙어 시야를 방해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걷는다. 차도 사람도 진행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니 서로 조심스럽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시인 나태주는 <풀꽃>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했다. 나의 눈(雪)을 보는 눈(目)이 그랬다. 맑고 깨끗한, 그 고결함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눈이 부셔서 언제나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 따윈 배낭 속에 넣어놓고 걷기에만 집중해야 한다.
설국(雪國)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안도한다. 제대로 걷기 힘든 내 다리 컨디션은 무릎까지 쌓이는 눈도, 울퉁불퉁 얼어 있는 눈길도 최악이었다. 오가며 발목 꺽인 것이 몇 번이었나, 엄청난 통증에 몸서리를 쳤다. 1,200 고지의 ‘오 세브레이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눈의 왕국인 동시에 공포의 설국이었다.
‘뜨리아 가스텔라’에 도착하니 눈이 언제 내렸냐는 듯이 날씨가 새침을 떤다. 거기에 맞춰 내 기분도 따라 움직인다. 라푼젤 언니와 여유롭게 순례자 메뉴로 저녁 식사를 마쳤건만, 스스로 미래소년 코난이라 자신들을 칭하는 전 부장과 김 대리의 식사에 합류해 수다를 떨었다. 오랜만에 유유자적했다.
어느 길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거개가 다른 색깔을 지녔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통하는 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 임을 알게 되면 신이 난다. 길 위에서 마음이 열렸거나 길이 터 준 혜안을 지닌 것처럼 말이 잘 통하니 말이다.
시인 나태주는 <풀꽃 2>에서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고 했다. 같은 맥락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미 이웃은 넘어섰다. 그러나 만나자마자 말이 통해 한마음이 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 역시 그렇다. 서로의 색깔을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런 만큼 인간관계가 무르익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같은 길을 걸으며 소통하다 보면 서로의 마음이 드러난다. 상대방의 진면목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부처의 눈에는 모두 부처로 보인다지만, 난 이때 비로소내 퍼즐에 들어맞는 사람을 발견한 기쁨을 맛본다. 이렇게 만난 길동무와는 계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러 날이 지난 후 만나도 금방 헤어진 사람처럼 친근하다. 서로 다른 색깔을 한 도화지에 칠하며 친밀감의 농도를 올리기도, 또 다른 형태의 여행을 꿈꾸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서로에게 스며들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많은 날을 길 위에서 보냈고, 많은 일을 겪었으며, 여러 얘기를 듣고 나누었다. 다양한 사람의 행태를 보면서 ‘인간만사 새옹지마’를 떠올린 날도 많았다.
그러니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자세히 보면 예쁜 사람이고 싶고, 오래 보면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싶다. 누구에게나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고, 알토란 같은 사람들과 사이좋은 관계이고 싶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잘 살고 싶다. 사람 냄새 폴폴 풍기며 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살이의 이치이고 묘미 아니겠는가.
* 걷기 28일 차 (오 세브레이로~ 뜨리아까스텔라(Triacastela)) 22km / 누적거리 656.5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