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무더위가 끝을 고하고 드디어 추석 연휴가 찾아왔다. 삶의 어느 길목에서 불현듯 펼쳐진 풍경이 있었다. 무더위 끝에 찾아온 추석,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들이 한 지붕 아래 모였다. 부산에서 올라온 남동생, 서귀포에 사는 여동생들, 그리고 조카까지, 제주시에 사느라 늘 바쁜 동생까지 한달음에 아빠 집으로 다들 집합했다.
엄마는 오전 11시부터 벌써 점심상을 분주히 준비 중이셨지. 가스레인지 위엔 호박 넣은 소고기뭇국이 끓고 있어 고소한 냄새가 났고, 여동생이랑 조카가 직접 만든 나물 반찬들은 저마다 다른 색깔로 싱그러움을 뽐냈다. 노릇하게 구워진 제주옥돔구이는 단연 최고였다. 특유의 고소한 내음을 풍기며 젓가락을 재촉했고, 갓 지은 밥알 위로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그 감각들 사이에서 우리는 조용히, 그러나 충만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지켜온 시간의 무게를 함께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인기 폭발이었던 건 제주산 고사리였지. 다들 육지고사리와 비교도 안된다며 한 마디씩 했다. 오동통하게 물기를 머금은 제주산 고사리를 씹는 순간, 그 입안 가득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만족스러웠다. 그 익숙한 맛과 향 속에서, 불현듯 젊은 시절의 엄마가 떠올랐다. 70평 넓은 집 베란다 가득 고사리를 펼쳐 널던, 햇살 아래 그 많던 초록빛 고사리만큼이나 풍성했던 엄마의 시간과 아낌없이 내어주던 그 사랑의 손길이 곧 만져질 듯 되살아났다. 그 한 가닥 한 가닥에 스며든 정성이, 이 밥상 위까지 온기를 더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막내여동생이 갑자기 추억 속의 엄마를 또다시 소환했다. 사진 속의 엄마와 우리는 웃고 있었고 더 젊었으며 더 어렸다. 사진 속의 집보다 지금의 18평 내 집을 비교하면 초라함이 앞섰지만 말이다. '더 열심히 돈 벌어야지!'하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때, 둘째 여동생과 함께 온 조카 표정이 유난히 환해서 달덩이가 생각났다. 추석 보름달만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스물일곱 젊은 나이, 이번에 사서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조카는 그야말로 우리 집의 '희망 아이콘'이었다. 대학 시절 전 학과 1등을 놓치지 않던 '타고난 언어능력'과 '끈질긴 노력'이 세상이라는 낯선 무대에서 드디어 결실을 맺은 셈이었다. 그녀의 밝고 듬직한 미소 속에서, 우리 가족에게 찾아올 또 다른 긍정의 기운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어린 유망주의 앞날을 응원하는 모두의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 끈처럼 단단히 얽혀 있었다.
그 전날에는 남동생이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짐빔 하이볼을 마시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어. 안주는 국룰 감자깡! 상큼하고 시원한 자몽 하이볼은 내 취향이었고, 남동생은 레몬맛을 즐기더라. 누나들의 사랑 속에 유독 어리광쟁이였던 막내 남동생은, 부산에서의 시간을 거치며 딴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의 단단해진 팔근육과 다부진 어깨는 단순히 몸을 가꾼 결과가 아니었다. 낯선 곳에서 홀로 서며 짊어진 삶의 무게와 책임감의 증거였다. 어느덧 어린 동생에서 가족을 지탱하는 묵직한 기둥으로 성장한 그 모습이, 괜히 마음 한구석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아, 이젠 누나들도 그에게 기대어도 좋겠다는, 그런 든든함.
어제는 남동생이 막내 여동생과 김녕 해수욕장으로 캠핑을 떠났다. 새벽엔 안개 낀 꿈결 같은 풍경이었을 테고, 아침 해가 솟을 땐 주변이황금빛으로 물들었겠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정오의 바다는 쨍한 코발트블루로 빛났을 테고, 해 질 녘엔 모든 것을 삼킬 듯 붉은 숨을 토해내며 하루를 마무리했을 거야. 밤에는 별을 품은 채 고요한 심연을 드리웠을 바다. 그 끊임없이 변모하는 바다의 표정이, 타지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온 그들에게 어떤 위안과 자유로움의 메시지를 전했을지... 내 마음마저 파도가 되어 일렁였다.
추석 당일인 오늘은 점심 식사 후, 남동생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갔고 우리 여자들끼리만 뭉쳤어. 셋째, 다섯째,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막내 여동생 집 근처에서 한잔 기울였지. 막내 여동생의 남자친구 이야기에 어깨춤이 덩실거리는 우리를 보며, 문득 " 좋은 벗이 생겼으니 현재를 마음껏 즐겨라, Seize the day!"라고 말해버렸다. 나이도 들 만큼 든 내가 이런 뻔한 조언을 해버렸다는 자각에 순간 움찔했지만, 속으로는 '나는 그렇게 답답한 사람 아니야, 꼰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긴 시간을 살아온 내 삶이 얻어낸 유일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현재'. 이 단어가 우리에게는, 거의 모든 것을 의미하니까. 지나간 여름이 끝나는 것처럼, 모든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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