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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 숲 Oct 26. 2023

모지스 그림 감상법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수오서재)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화가,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와 그림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한쪽 귀로만 듣던 그녀의 그림이 궁금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왔다.

수오서재에서 발행한 책 제목은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책에는 그녀의 그림 67점이 들어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삶에 대해 쓰여 있다.


모지스 할머니로 불리기 전 애나 메리 로버트슨은 1860년 미국 워싱턴 카운티의 한 농장에서 이민자의 후손으로 열 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열두 살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다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시골 농장의 아낙네로 살았다. 그녀는 남편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버터나 시럽, 감자칩 등을 만들어 돈을 벌 만큼 생활력이 강했다. 76세가 되어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80세에 개인전을 열고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600여 점의 그림을 남겼다.


모지스의 그림 속에는 그녀가 태어나고 살아온 장소와 사람들 즉, 19세기와 20세기 미국의 풍경이 보인다. 그녀의 글 속에는 낙천적이고 부지런하고 능동적인 그녀의 인생이 담겨 있다. 한 세기를 살면서 수많은 좋은 일과 나쁜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녀는 그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슬픔이 주는 인생의 교훈을 배우고 큰 잃음 속에서 작은 얻음에 감사할 줄 안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그림에는 따뜻하고 밝은 에너지가 있다.

말굽 박기(1960년)  p38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면서 풍경화를 주로 그린 그녀의 그림에는 산과 언덕, 나무와 집들, 일하는 사람들과 노는 아이들, 구부러진 길과 울타리들이 보인다. 농장의 풍경과 할머니 댁, 어릴 적 집과 가을 풍경, 눈이 오는 겨울 풍경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녀가 살았던 미국의 시골 마을 풍경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썰매 타기와 산타가 굴뚝을 타고 내려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은 누구나 지나 온 어린 시절회상케 하는 재미가 있다. 말굽 박기, 시럽 만들기, 마을 축제,  이사하는 장면과 같이 생활 속 소재를 그린 그림에는 그녀가 살았던 당시의 생활 풍습과 시대 배경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그녀의 풍경화에는 원경에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언덕이 그려져 있어 그림을 포근히 감싸주는 느낌이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크고 작은 나무들은 마을 풍경을 만들어낸다. 봄이면 신록이, 여름이면 녹색 나무들이, 가을이면 단풍 든 나무가, 겨울이면 푸른 상록수나 갈색잎이나 눈 맞은 활엽수들이 그림에 자연이 주는 시간의 풍경을 더한다.

시럽 만들기 중 일부 (1955년)  p60

그녀의 풍경화는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시럽 만들기’라는 그림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커다란 솥에 단풍나무 수액을 넣고 끓이는 장면이 있다. 어떤 사람은 어깨에 나무를 걸고 양쪽으로 통을 매달아 수액을 나르고, 누군가는 수액을 솥에 붓고 누구는 구경하고 누구는 단풍나무에서 수액을 받는다.


어린 시절 편 에피소드 하나를 보면 2월이면 아이들은 아침 일찍 숲으로 달려가 간 밤에 쌓인 단풍나무 수액을 모아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오후에 한 번 더, 해 질 녘 한 번 더 모아진 수액을 커다란 솥에 넣고 하루 종일 끓여서 졸였는데 이런 식으로 시럽을 만들거나 설탕을 만들었단다.


집에서 만들어진 시럽은 다음날 아침 메밀 팬케이크에 원 없이 뿌려먹고 저녁에는 뜨끈한 빵에 또 한가득 뿌려 먹었으니 얼마나 달콤했을까. 달콤한 시럽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시럽 만드는 과정은 아이들에게 놀이요 커다란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아침마다 아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경쟁하듯이 숲으로 달려가 수액이 얼마나 찼는지 보고 또 자기 수액통을 들고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가져온 수액통을 받아 커다란 솥에 넣고 하루종일 졸여 식사 때마다 빵에 달콤한 시럽을 뿌려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럽 만들기’ 그림은 집집마다 집 앞에 커다란 솥을 걸어놓고 수액 통을 이고 옮기는 사람들로 분주한데 흡사 마을 축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녀의 그림은 어찌 보면 투박하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그림이 대중화되고 인기가 높아질수록 미국의 화단과 평단에서는 그녀의 그림을 외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에 미국인들에게 전통과 뿌리를 환기시키며 소박하고 단순한 삶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그녀의 작품이 재조명되었다고 편역자는 말한다.


나는 화단과 평론가들이 그녀의 그림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모지스의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생각이 든다. 제도교육 속에서 혹은 스승에게 배우거나 화가들끼리 교류하며 영향을 받아 그린 게 아니라 시골의 농장에 살면서 그저 그리고 싶은 마음으로 일상의 삶과 지나온 추억을 그려간 모지스의 그림에는 자연스러움과 조화로움과 향수가 있다. 그것이 모지스 그림의 매력이고 개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지개 (1961년) p8

그녀의 그림에는 풍경과 함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대부분이 일하는 사람들이다. 지붕을 고치고 말굽을 박고 쟁기질을 하고 수확을 하고 이삿짐을 나른다. 그녀가 일평생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온 사람답게 그림 속 인물들도 움직이며 일한다.  


모지스의 그림에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있다. 구불구불한 마을 길과 둥근 산의 능선, 마을 교회와 소박한 집들, 울타리와 그 안에 가축들… 남들이 늦었다고 말하는 나이에 그림을 시작해 인생에서 늦은 때란 없다는 걸 몸소 보여준 바지런함과 낙천성이 있다.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알지 못합니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그래왔고, 또 언제까지나 그럴 겁니다."


한 세기를 살다 간 그녀가 남긴 말들 중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깊이 와닿는다.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 의지하면서 살고 싶어질 때마다, 쉽고 편하게 살고 싶을 때마다 그녀의 말을 되돌아보게 될 것 같다.


스스로 인생의 길을 만들어 가는 삶을 살아서 아마도 그녀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좋아하는 그림을 재미있게 꾸준히 그려가는 삶을 살아서 최고였다고 말했을 것 같다.


76세에 그리기 시작해 101세로 숨을 거두기까지  1,600여 점을 그린 그녀는 25년 동안 그림을 그린 셈인데 계산해 보니 일 년에 64점, 그러니까 한 달에 5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무얼 그릴까 막막하다가도 붓만 잡으면 그리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는 그녀, 그녀의 삶은 성실하게 꾸준히 무언가를 하면서 살 때  일상이 만들어내는 기적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적은 멀리 있는 신기루가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일상의 삶 속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려주는 것 같다,  따뜻하고 정겹고 아기자기한 그림으로.



* 표지 그림 : 농장에서의 이삿날 중 일부(1951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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