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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은 숲 Nov 09. 2023

구멍가게의 사계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그림과 글 이미경, 남해의봄날)

올 한 해, 건물을 중심으로 한 어반스케치를 그리다 보니 그림 중에서도 건물과 나무가 함께 그려진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서 이미경 작가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깜짝 놀랄 만한 디테일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그린 오래된 구멍가게와 주변 풍경이 묘한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도서관에 가 보니 마침 그녀가 그리고 글을 쓴 책이 두 권 있었다. 남해의 봄날에서 발행한 하나는 2017년에 출판된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고 또 하나는 2020년에 출판된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이다.


서양화를 전공한 이미경 작가는 구멍가게를 20년 넘게 그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 속 구멍가게는 7,80년대 혹은 그 이전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추억을 되살리는 애틋함을 전해준다. 그래서일까, 아크릴 잉크를 써서 펜으로만 그렸다는 구멍가게를 오래오래 바라보게 된다.

 <동전 하니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에 수록된 이미경 그림 <정선에서>

작가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있으니 붓으로 칠하지 않고 오직 펜으로 선을 그리고 선들을 겹치고 선들을 이어서 면과 명암을 만들었을 더디고 정교하고 섬세한 그녀의 일상 속 작업이 느껴진다.  단풍 든 가을 산속, 애잔하게 앉아 있는 구멍가게 풍경을 만들기 위해 그녀의 일상은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고되고 또 알마나 즐거웠을까, 상상한다. 그래서 그녀가 그린 나무와 풀과 돌, 가게 그림들오래오래 눈길을 주게 된다.


푸른 양철 지붕이 세월의 더깨에 녹슬고 오래된 전봇대와 전봇대를 아슬아슬하게 잇는 전깃줄, 밖에 걸린 빨래들, 가게 옆에 덩치 큰 바위, 누렇게 붉게 푸르게 언덕을 물들이고 있는 나무들까지 펜으로 스스슥 스스슥 채워갔을 작가의 시간과 구멍가게의 시간들이 감상자인 내 눈에 오버랩된다.

<봄날에> 이미경 그림(2014)
<청운면에서-겨울> 이미경 그림(2018)


작가의 구멍가게 그림에는 사계가 담겨있다. 봄에는 목련꽃이 활짝 핀 나무가 곁에 서 있고 여름에는 초록색 나무들이 구멍가게를 뒤에서 보듬듯 안아주고 가을에는 노란 은행잎으로 물든 은행나무가 듬직하게 지켜주고 겨울에는 나뭇가지에 하얀 눈을 맞은 나무와 새둥지가 눈 맞은 구멍가게와 동무하듯 서 있다.


그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어린 시절의 아련했던 추억들이 하나둘씩 등불처럼 떠오를 것만 같다. 가게 앞에는 툇마루가 길손의 걸음을 쉬게 하고 벽 한쪽에는 빨간 우체통이 또 다른 한쪽 벽에는 나무로 만든 공중전화대가 걸려 있는 구멍가게, 나무로 만든 미닫이문을 드르륵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오래된 나무 선반에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 구멍가게...


함석지붕이나 양철지붕, 혹은 시멘트 기와로 만든 지붕은 주인장의 나이만큼 오래되었고 가게 앞에는 나무 의자 몇 개가 있거나 커피 자판기가 햇볕에 바랜 채 시간 속에서 졸고 있고 햇빛을 가리기 위한 천막도 시간 속에서 빛바래가고 있는 구멍 가게...

퇴촌 버스 정류장 (2012, 이미경)

사전적인 의미로 구멍가게는 조그맣게 차린 가게를 말한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 마을조차  편의점이 들어서  구멍가게를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거대자본이 들어서기 전 구멍가게는 어느 동네에나 있었던, 아이들에게는 주전부리할 것들이 널려 입과 눈이 즐거운 장소였다.


이미경 작가는 1997년 경기도 퇴촌에 이사해 살면서 구멍가게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름답고 한적한 자연 풍경 속에 놓여 있는 봄날의 구멍가게를 보고 유년시절 구멍가게에 들락거리던 즐거운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렇게 그리기 시작한 구멍가게 그림이 사람들에게 기억과 그리움과 아련함을 주면서 작가는 알려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구멍가게를 찾아 그리는 화가가 되어 서울에 있는 구멍가게뿐 아니라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와 강원도까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구멍가게를 찾아서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구멍가게를 그리기 위해 작가는 길을 떠난다고 한다. 먼 길을 찾아가 만난 구멍가게에 들어가 작가는 오래된 가게만큼 연세 드신 주인장을 만나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나눈다. 

<명진슈퍼> 이미경 (2020)

그래서일까, 작가가 그린 구멍가게 그림에는 오래된 가게가  품고 있는 사연이 들릴 것만 같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계절의 풍경이 지나가기도 한다. 구멍가게 주변에 변함없이 서 있는 오래된 나무가 들려주는 시간의 풍경이 보이기도 한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 버스정거장 근처에서도, 조그마한 골목길에서도 구멍가게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오래되고 낡고 빛바랜 구멍가게 대신 세련되고 깔끔하고 일률적인 편의점들이 들어서 있다. 새 것이 낡은 것을 대체하고 세련된 것이 촌스런 것을 대체하고 거대 자본이 작은 것들을 무너뜨리는 편리한 세계에 살면서 마음 한 켠이 공허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본다.


전보다 나아진 경제적 풍요 속에서 그만큼 각박해진 마음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미경 작가의 그림 구멍가게에는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따뜻함과 정겨움이 있다. 그래서 오래도록 구멍가게 그림을 들여다 보게 되는 것 같다. 사계가 담겨 있는 자연과 어우러진 구멍가게 그림 속에서 마음평화로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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