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순진이 아버지는 장에 가 암탉 한 마리를 사 왔다. 가축 기르기는 처음이라 순진이와 누나 순금이를 비롯한 온 식구가 기뻐했고 암탉은 까매서 이름을 깜둥이로 지었다.
순진이네 가족은 깜둥이에게 참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삼대를 엮어 벽을 둘러치고 수수깡과 이엉으로 지붕을 덮어 따뜻한 닭장을 만들어 주었다. 깜둥이가 혼자 외로워 보인다고 아버지는 깃털 붉은 수탉과 노란 암탉을 더 사 왔다.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고 닭들은 몸뚱이가 크고 살도 통통해졌다. 어느 날 깜둥이가 첫 달걀을 낳았고 할미꽃이 모가지를 내밀 즈음 깜둥이는 열다섯 마리 병아리의 엄마가 되었다.
아기 병아리들은 엄마를 닮아서 새까만 깜장 병아리다. 깜둥이는 제 새끼들을 무척 사랑했고 병아리들은 어미를 졸졸 따라다닌다.
저녁 무렵, 아궁이 앞을 지나가던 병아리들 중 한 마리가 따뜻한 아궁이 속으로 뛰어들어 솜털이 모두 타 버리고 성냥개비 같은 두 발이 불에 데어 껍질이 부풀어 올랐다. 가엾은 병아리는 애처롭게 울고 엄마 닭은 마당에서 뺑뺑이를 돌며 새끼를 부른다.
순진이 어머니는 불에 덴 병아리를 방으로 데리고 가 참기름을 발라주고 헝겊으로 싸서 아랫목에 뉘이며 치료해 주었다. 아픈 병아리는 울면서 버르적거리고 어머니는 다친 자식을 어루만지듯 밤에도 병아리를 작은 바가지에 담아 이불속에서 손으로 붙잡고 잠을 청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병아리의 불에 덴 상처는 아물었지만 부리는 문드러지고 발가락은 한 마디씩 떨어져 나가고 종아리는 오그라들어 바로 서지도 못하게 되었다. 솜털은 다 타 버려 알몸뚱이인 채 흉측한 모습을 하게 되었는데, 순진이네는 그런 병아리를 가엾이 여겨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한 달이 지나자 불에 덴 병아리가 엉거주춤 서서 빼딱빼딱 걷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불에 덴 병아리는 빼떼기라 불린다. 괴물 같은 모습에 어미 닭도 형제 병아리들도 빼떼기가 곁에 오면 죽일 듯이 달려들어 쫓아내거나 쪼아서 빼떼기는 언제나 외롭고 쓸쓸하다. 그래서 빼떼기는 자신을 살려주고 돌봐준 순진이 어머니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
빼떼기는 솜털이 모두 타 버려 보기 흉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털이 없어서 항상 바들바들 떨고 있다. 그런 빼떼기를 어머니는 손으로 감싸 주고 품어 주다 못해 조그만 헝겊으로 빼떼기 옷을 만들었다. 보드라운 솜을 안에 넣고 만든 커다란 골무 같은 빼떼기 옷은 식구들과 이웃 사람들까지 웃게 만들었는데 무명옷을 입고 조롱박 모이 그릇과 깡통 물그릇을 가진 빼떼기는 그렇게 순진이네 가족이 되었다.
빼떼기는 불에 타 거의 없어진 주둥이 때문에 모이를 주워 먹는 일조차 힘이 드는데 살기 위해 먹는 매일매일의 일상이 도전이어서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살아내는 빼떼기가 순진이네 가족은 대견하고 기특했다.
가을이 되자 벌거숭이 빼떼기 몸에 엉성하게나마 새까만 깃털이 나기 시작한다. 머리 꼭대기에 새빨간 볏도 내밀었다. 비록 밋밋한 볏이지만 빼떼기가 수탉이라는 걸 알고 식구들은 모두 기뻐했는데 발가락과 발톱이 다 타 버리고 이웃집 개에게 날개까지 물린 빼떼기는 다른 수탉들처럼 홰를 치며 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지 1년이 된 빼떼기는 ‘꼬끼요’가 아닌 ‘꼬르륵’ 거리며 울어 수탉으로서 제구실을 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그런 빼떼기가대견하고 신기해순진이네는 한바탕 큰 웃음을 웃는다.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졌다.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고 순진이네도 피난 가기 전 닭과 병아리들을 모두 내다 팔았다. 하지만 빼떼기는 내다 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피난을 데리고 갈 수도 없다. 아버지는 결국 마지막 결정을 내리고 빼떼기에게 말을 건넨다.
“빼떽아, 지금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서 우리는 피난을 가야 한단다. 그래서 너 혼자 두고 갈 수도 없고 데리고 갈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너를 잡아먹는다. 너도 그 편이 좋겠지?” (p56)
이웃의 손으로 빼떼기는 목이 잘리고 어머니와 순진이와 순금이는 부엌으로 들어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도서출판 창비에서 권정생 문학 그림책으로 나온 <빼떼기>는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다. 그토록 정성 들여 살려낸 빼떼기를, 가엾고도 대견한 빼떼기를, 죽을힘을 다해 살려고 노력한 빼떼기를 죽여야 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픈 일이다. 전쟁은 인간에게도 가축에게도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불에 데어 상처 입은 빼떼기, 보기 흉측한 모습 때문에 외톨이가 된 빼떼기, 잘 걷지도 못하고 털도 없고 밋밋한 볏을 가진 빼떼기 모습을 거칠고 투박하게 그려낸 김환영 선생님의 그림은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역할을 한다.
상처 입은 빼떼기를 돌보는 순진이 어머니, 가족이 모두 힘을 합쳐 닭장을 만드는 모습, 헝겊을 잘라 무명 저고리를 만드는 어머니 모습의 그림들은 마치 박수근의 그림처럼 토속적이고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래서 빼떼기 이야기는 살아 숨 쉬는 작품으로 거듭난다.
권정생 선생님이 만들어낸 빼떼기는 작가의 가난했던 삶만큼이나 눈물겹다. 작가는 빼떼기를 통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약함 속에서 발휘되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품고 있는 용기와 인내를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는 그 약하디 약한 생명을 보살피고 보듬어주는 순진이 어머니의 너그러운 마음을 통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힘을 보여준다. 대자연이 주는 어머니 같은 자애로움으로, 바다와 같이 너른 마음으로, 자신의 핏줄도 거들떠보지 않을 만큼 흉측하고 약한 생명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푼다.
전쟁은 일상의 평화를 깨뜨린다. 사람도 동물도 언제 어떻게 이별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축의 운명은 가축을 키우게 된 본질적인 의미로 돌아간다. 빼떼기는 팔팔 끓는 물에 간신히 돋아난 깃털이 벗겨져 사람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가축인 빼떼기의 운명이기도 하고 전쟁이라는 상황이 만들어낸 잔혹함이기도 하다.
사람도 동물도 만남이 있으면 언젠가는 헤어지지만전쟁속에서 이런 이별은참혹하다. 그래서 빼떼기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슬픈 여운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