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외)할머니라고 한 이유는
난 태어났을때 (외)조부모 네분 중 외할머니만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외할머니를 '할머니'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때 간혹 오해를 산다. 나에게 할머니라는 호칭은 당연스럽게 외할머니지만, 다른 사람에게 할머니는 친할머니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럴 수 있지만, 할머니는 나에게 참 큰 존재다.
어렸을때 할머니 손에 많이 키워졌고, 커가면서도 교류가 참 많았다.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생활력과 나누는 '정'은 분명 할머니로부터 시작됐을, 더 위에서부터 시작됐을테다.
할머니의 칠순이셨던 2011년에는 고3이라는 이유와 특별히 내가 할 수 있었던게 없었다는 이유로 그냥 넘어갔었다. 그래서인지 팔순이셨던 2021년에는 무언가를 해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기획하기 시작한 할머니의 팔순잔치. 코로나가 왕성할 때라서 이사람 저사람 불러서 성대하게는 하지 못했지만. 외가 친지분들을 모시고 나름 성대하게는 했다.
장소를 알아보고, 어떤 선물을 드리고, 어떤 음식을 먹으며 어떤 기억을 남게 해드릴까.
몇날며칠을 고민하여 사촌형과 함께 계획을 완성 시켰다. 할머니는 너무 고맙고 놀랬다며 계속 우셨다. 지금까지 그런걸 해드린적이 없어서였을까. 그 날 이후로 앞으로 더 할머니에게 많은걸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즈음, 한가지 더 마음에 걸렸던 것은 할머니의 집이 없었다. 항상 이모들의 집과 우리집을 번갈아가며 지내셨던 할머니, 항상 본인의 집에서 혼자 사시는걸 몇번 말씀은 하셨었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의 집을 알아봤고, 2022년, 어려웠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쉽게 할머니 집을 구해드렸다.
'우리 문규 덕에 내가 이렇게 산다'는 말씀을 아직까지 하시곤 하신다.
이제야 내가 받은거에비해 할머니에게 절반은 했다고 생각한다. 아직 더 해드리고 싶고, 더 해드릴게 많다.
근데 연세가 드실수록 아픈곳도 많아지시고, 드시는것도 많이 줄으셨다. 허리는 더욱 굽어지셨다.
지금도 2주일에 한번씩 찾아뵙고 있다. 내가 해드린 집이 대전에 있기에, 가까이 있기에 이것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주 찾아봬려고 또 가까운곳에 집을 해드린것이기도 하고.
내가 생각한 하루하루와 할머니에게 하루하루는 다르다. 더 늦기전에 할머니에게 더 잘해드리고 싶다.
역시나 항상 강조하는 '있을 때 잘하고'싶기에.
할머니란 내게 참 큰 존재이다. 아프지 마시고 나와 함께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