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의 꿈

by 지한

어릴 적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질문만큼 어려운 게 꿈을 묻는 질문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되고싶은 게 바뀌는데 그걸 굳이 정해놓고 나는 뭐가 되겠다며 말을 하고 다니는 게 꼭 공수표를 날리는 것 같기도 했고 정말 되고싶은 걸 말했을 때 어른들의 훈수도 싫어서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동화 작가나 피아니스트 얘기를 꺼냈을 땐 책 읽는 걸 좋아하면 국문학과 교수나 교사는 어떠냐, 우리집은 피아노 오랫동안 못시켜준다 그건 취미야, 뭐 이런 류의 현실적인 덕담을 몇 번 듣고나서, 어차피 대부분의 어른들도 꿈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 않아보여서 좀 아무렇게나 대답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되어서 아이들에게 재밌게 국어를 가르치고 싶었다던 엄마도 연년생 남매 두 명을 자리에 앉혀놓고 학습지를 풀게 하려면 한 명씩 번갈아가면서 붙들고 지지고 볶고 씨름을 하던데.


중고등학교 진로탐색 시간에 영문학과 교수, 동시통역사, 영화번역가, 언론인 등등 어른들이 봤을 때 '그래, 그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 미래가 밝은 청소년의 꿈이라고 할 수 있지'라는 말을 듣는 직업군을 찾아서 적어냈고 누가 물으면 대충 둘러대는 걸로 상황을 모면했다. 억지로 끼워맞춰 생각해보니 항상 글에 대한 일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중에서 단 하나도 진심으로 그게 되다고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아본 적도 별로 없으니까 당연히 그런 직업은 천부적인 재능과 약간의 운이 따라주는 사람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항상 글을 쓰는 게 재밌었고 가끔 설레기도 했다. 그치만 정말 순수하게 좋아서 하는 취미같은 일이 직업이 될 수 없다는 생각, 글을 쓰는 사람은 좀 타고난 소질이나 센스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생긴 것부터 가만보면 넌 좀 느려터졌다는 말을 듣는 내가 어떻게 감각적인 글을 쓰겠냐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자신에게 숨겨진 재능을 발견해라, 내 인생의 주인공인 나를 위해서 꿈을 가져라, 노력하고 상상하면 어떤 꿈이든 현실로 만들 수 있다,를 주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많은 교수자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나는 복수전공을 선택하는 순간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꿈이 없었다. 첫번째 인턴이 끝나고 두 번째 인턴도 끝나갈 무렵, 본격적으로 취업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돌연변이처럼 글을 쓰겠다는 마음이 갑자기 불같이 일어났고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데 딱 이틀 걸렸다. 작고 귀여운 조약돌 같은 월급을 모래알로 쪼개서 만들어 둔 비상금 통장을 털어 드라마 아카데미 수강료를 마련했다.


수업을 들으며 습작으로 4편의 짧은 시나리오를 썼다. 그 외에도 매주 과제를 꼬박꼬박 제출했고, 수업 3시간 전에 도착해서 새로운 글을 쓰거나 지난 시간에 피드백 받았던 부분을 고쳐 쓰곤 했다. 제출한 글은 수강생들과 강사님에 의해 철저하게 분석 당한 다음, 필요없는 부분은 빨간펜으로 죽죽 그어졌다. 첨삭 이후에 남는 건 거의 주인공 이름밖에 없는 날도 있었다.

수업을 듣기 시작한 지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 강사님께서 이렇게 피드백 시간에 글이 난도질 당하는게 작가가 되면 일상이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글 쓰는 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매주 머리 쥐어뜯는만큼 요즘 진심으로 행복한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런 변태같은 답을 웃으면서 하는 걸 보니 어쩌면 나는 진짜로 행복한 게 맞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때 처음으로, 어쩌면 글을 쓰는 건 직업이 아니더라도 계속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 먹고 사는 일과 얽힌 몇 가지 일들, 정신을 쏙 빼놓고 흔드는 일이 동시에 생기면서 한동안은 글을 아주 놓아버리기도 했었다. 쓰는 건 물론이고 책이나 대본을 읽지도 않았고 카톡을 쌓아두고 답장을 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글과는 좀 거리가 있는 생활을 계속 하다가, 작아진 바지가 많아지면서 몸이라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틈틈이 조깅을 하기 시작했다.

밤낮이고 새벽이고 뛰다보니 머릿속이 한결 정돈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은 끝나도 마음은 오랫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릴 수 밖에 없는 법이다'라는 소설가 김연수의 말처럼, 결국은 쓰다 만 일기장을 펼쳐들었고 리셋한 블로그가 한번씩 생각날 때면 아쉽기도 했다.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그땐 어떤 기분이었고 지금은 어떤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 건지에 대해 짧은 글 몇 줄로 방황을 정리했다. 다시 일기를 쓰고 입사지원서와 자기소개서를 고쳐 쓰고 예전에 읽었던 <노르웨이 숲>을 꺼내읽기 시작했다.


실컷 엎어져있다가 일어나게 된 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뭔가를 쓰고 있겠구나 싶은 묘한 확신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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