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의 무게

by 지한

내가 못하는 수 백가지 일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나에 대한 칭찬 받아들이기"다.

나는 아직까지도 진심이든 빈말이든 칭찬을 듣는 일에는 익숙하지가 않고 이에 대한 적절한 리액션도 찾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하니 벌써 머릿속이 하얘진다.


첫째로 태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약간의 오글거림과 부담스러움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격 때문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칭찬받는 게 참 민망하다 못해 창피했다. 그래서 아예 그 자리에서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장난스런 행동을 하면서 오바를 떨곤 했다. 그거야 사춘기가 오기 전에 좀 작고 귀여웠을때나 가능했지 시간이 좀 지나서 덩치는 엄마보다 더 큰 애가 밖에서 그러고 있으면 등짝을 맞을 일이기 때문에, 좀 크고 나서는 "어유 아니에요, 저 보기보다 안그래요" 하면서 손사래를 치거나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엉성한 내 실수 한 가지를 말해서 실소를 터뜨리게 만들곤 했다. 대부분은 그냥 "겸손까지 하네, 호호"하면서 웃고 넘어가주셨지만 칭찬해 준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해본 말일 수도 있는데 유난 떠는 나를 보고 퍽 난감했을 것 같기도 하다.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 간만에 주말에 쇼핑하러 나간 백화점에서 무슨 일인지 파스텔톤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고 하필이면 색상이나 길이감까지 맘에 들었다. 오피스룩으로도 괜찮다는 점원 분의 말에 그죠그죠 제가 봐도 그래요, 하면서 격한 끄덕임으로 호응을 하고 쇼핑을 시작한 지 30분만에 옷을 사고 나왔다.

늘 무채색 계열의 셔츠와 바지, 스니커즈, 단화를 고집하다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출근한 나를 보고 사무실은 소소하게 난리가 났다.

"오~ OO씨 오늘 입은 옷 색깔이 참 잘 어울려요"

"내일도 제발 그렇게 입고 올거지?"

"아유, 그런 옷 있으면 젊을 때 자주 입어야지"

"혹시 데이트 있는거면 5시 59분에 퇴근해" 등등..

막내의 새 옷에 대한 각자의 한줄평을 남겨주셨고 그렇게 한 줄에 손사래 10번을 했더니 폭풍같은 오전이 지나갔다.

누군가에겐 즐겁고 누군가에겐 웃픈 주식창 이야기로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큰 회의 준비를 위한 작은 회의로 오후가 지나갔다. 퇴근 후 별다른 약속 없는 날이라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좀 뛰어서 집에 가려고 했는데, 당시 사무실에서 나에게 가장 잘 해주셨고 꽤 친했던 몇몇 분들께서 저녁 약속 급조한 데에 같이 가겠냐고 물어주셨다. 횟집 가신다는데 당연히 따라붙었다.


회와 매운탕을 안주삼아서 술이 조금 취하고 분위기가 슬 올라가서 누군가가 한 말 한 마디에 낄낄 깔깔 쉬지 않고 웃음이 터지기 시작할 때 어떤 분께서 웃으면서 장난을 치셨다.

"우리가 말이야, 어, 너보구 좀 귀엽다, 이거 일 잘했다고 하면 아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하는거야. 그리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이... 이 귀염댕이!"

윽, 귀염댕이.. 아마 그 단어는 돌잔치 이후로 못들어봤을 말일 것 같다고 하면서 다같이 빵 터졌고 다른 얘기를 하면서 2차까지 재미나게 노는 와중에도 나는 오늘 하루종일 내가 들었던 말을 생각해봤다.

아마 평소와 다른 모습이 신기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거고, 진짜로 옷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해본 말일 수도 있을 거고, 아니면 막내 직원에게 한번씩 보이는 관심의 표시일수도 있었을텐데 굳이 "아이고 아닙니다!" 하면서 장난스레 쌍수 들고 엑스까지 그려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었다.


그날 밤 술이 살짝 덜 깬 상태에서 거울을 보고 몇 십 년 간의 칭찬 알러지를 극복하기 위해 연습을 해보려고 했다. 칭찬을 받았다 생각하고 "아유 감사합니다~"를 말하기 위해 입을 뗐는데, 일단은 입꼬리가 어색하게 한쪽만 올라가 있었고 짝짝 손뼉을 쳐서 텐션을 올리지도 못했고 또.. 칭찬을 받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부끄럽고 고개가 저절로 좌우로 도리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며칠 뒤 자기 전에 폰을 보다가 칭찬을 받았을 때 네고왕 출연자 광희처럼 해보라는 트윗을 읽게 되었다.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칭찬을 다 듣네, 나 증말 인생 잘 살았네~" 이런 식의 뉘앙스였던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칭찬해 준 사람도 기분 좋고 칭찬 받은 사람도 기분 좋은 정도의 리액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게도, 그 이후에 칭찬을 받을 때에도 어정쩡한 리액션이 먼저 치고나오는 바람에 연습했던 멘트를 해보지는 못했지만, 수 많은 시뮬레이션 끝에 "아이고 오늘 무슨 날이길래 이렇게 좋은 말을, 복받으실겁니다" 정도의 리액션을 하며 허허 웃을 수는 있게 되었다. 언젠가 가족들 앞에서라도 예행 연습을 해봐야하는데. 아 그러려면 내가 칭찬받을만한 예쁜 짓을 하나 해야하는데, 지금 그게 취업 말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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