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클리셰

by 지한

2년 전 겨울, 행복하려고 퇴사를 했고 한 3일 쯤 격하게 고민했다. 더 놀 것인가, 바로 취업 준비를 할 것인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바로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무한도전에 나왔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거라는 박명수 삼촌의 말이 뼈아프게 들리기 시작했다. 수 개월을 일주일에 10개가 넘는 회사에 지원을 하고, 가뭄에 콩나듯 오는 면접 기회를 잡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배에 힘을 주고, 입에는 펜을 물고 폰으로 영상을 찍어가며 수도 없이 연습을 했다.


올해만 스무 개가 넘는 최종면접에서 탈락하면서 나조차도 나를 한심하게 보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왜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정성껏 일을 망치는 건지, 내가 진짜 그렇게 밥값도 못하는 쓸모없는 인간인지를 생각하다보니 자괴감은 커졌고 예전 어느 때처럼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멍한 상태로 바깥에 나가서 걷다가 아이스 커피를 마시고, 마신 걸 까먹고 또 마셨다. 보행신호가 어떤건지 잘 생각나지 않아서 평일 대낮에 신호등 앞에서 주저 앉았던 날, 머릿속 어딘가가 틀려먹었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방문한 병원에서 말이 정리되지 못한 채 나올까봐 미리 핸드폰에 적어둔 글 몇 줄을 보여드렸다. 상담 전에 몇 가지 검사를 해야했고, 첫 상담에서 빨갛고 파랗게 물든 뇌파 사진을 보면서 내 상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몇 주 정도 증상에 맞게 약을 조절해보고 상담을 병행하면서 수면시간이 점차 안정적으로 늘어났다.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 규칙적인 하루 일과가 생기고 생활습관이 잡히면서 한결 나은 일상이 가끔씩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면접 기회가 주어졌지만 몇 차례 면접 이후에도 합격 소식은 없었다.


상담을 진행하며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면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면접은 나쁘지 않게 봤지만 저번에도 비슷하게 봤을 때 떨어졌으니까, 이번에도 떨어질 것 같아서 앞으로도 큰 기대를 안하고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엎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려면 더 많이 힘들 것 같은데 사실 이젠 다시 그만한 힘을 낼 자신이 없다, 그치만 되는 데까지 해봐야 정말 취업시장에서 내가 필요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미련이 안남을 것 같다고도 말했다.

결과야 어찌됐건 간에 쉼없이 뭔갈 하려고 하는 건 긍정적인 시그널이니, 그게 뜻대로 잘 안된다고 해서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지는 말고 해보는 것 자체에 포커스를 두는 마인드셋을 가져보라는 내용으로 상담이 진행되었다.


10분 정도의 상담에서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되고 또, 붙었다고 해서 막, 엄청 기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은 합격과 불합격, 좋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 그저 그런 일들은 삶에서 계속 반복되면서 살아질거고, 이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지금보다 조금 더 편안해질 수 있을 거'라는 말이 좋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날부터 평온하게 며칠을 보냈다. 사실 하루에 5개의 불합격 통보를 받고나서도 화상 면접을 봐야 했던 날과, 하필이면 날짜가 겹치는 바람에 다른 면접 2개를 포기하고 간 최종면접에서 또 떨어졌던 날은 저녁부터 밤까지 바깥에서 죽도록 뛰었고, 집에 들어와서는 샤워기를 틀어놓고 질질 짰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엔 혼자서도 멀쩡하게 밥을 잘 먹고 운동도 하고 또 또 또 입사지원서를 내밀었다. 지치지 않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최면을 걸며 뻔한 일상을 지켜나가는 중이다.


삶이 드라마 작가라면 젊고 창창한 내 인생 초반부에 장애물을 너무 빈번하게 설치한 부분에 대해서 실컷 욕을 해주고 싶다. 이미 많이 봤으니 이젠 작작 좀 하라고. 그러니 가끔은 주인공이 열받지 않게 좋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 그리고 그저 그런 일들을 에피소드로 적당히 넣어서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시련과 행복만 줬으면. 아, 그리고 이왕 나를 주인공으로 쓰는 거라면 저녁 드라마 클리셰처럼 결국에는 뭐라도 하나 해내고야 마는 성장캐 주인공으로 좀 만들어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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