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모두 사랑해버리기로 했어

by 지한

내 성격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20정도는 단순하고 80정도는 예민하다.

무탈하고 무난무난하게 넘어가는 순간이 있으면서도, 뭔가 하나에 꽂히거나 극도로 긴장하는 순간이 오면 폭발할 것 같다거나 무기력함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병원에서 받은 여러가지 검사에서 내 긴장과 예민함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높은 수준으로 나왔다.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뇌가 많이 지쳐있다는 의학적 소견도 나왔고 그럴 때 먹어야 하는 약도 추천해줬다. 다행히 요즘은 약이 잘 나와서인지 아니면 세월이 지나면서 내 성깔도 한 풀 꺾여서인지 예전보다는 좀 덜해진 것 같아서 생활하는 데에 큰 지장은 없다.


그래도, 가끔 이 세상에는 거슬리는 것들이 많이 보인다.


깜박거리는 초록불 보행자 신호를 초조하게 쳐다보며 길을 건너고 있는 아이와 아이 엄마를 무시하고 그 앞을 쌩 하고 지나가는 정신나간 자동차,

산책로 중앙에서 강아지가 똥을 누게 하고 그걸 치우지도 않고 제 갈길을 가는 개주인,

아파트 화단에서 뭘 보냐는 눈빛으로 어른들을 꼴아보며 전자담배를 씩씩하게 피워대는 중학생들,

굳이 전동휠체어를 밀어내고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10초 먼저 타야 속이 시원한 다리 멀쩡한 사람들,

그리고 혼자 운동하는 사람들을 알아보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이비 종교 전도자들,

밤 열 두 시가 넘도록 개가 너무 짖어대서 인터폰 한번 했다고 발망치로 보복소음을 만들어대는 윗집 사람들.


내 빡침 포인트를 자극하는 것들은 왜 이렇게 많을까, 이런 것들을 잊게 할만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왜 쉽게 떠오르지 않는 걸까. 이런 날은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폰 게임도, 유튜브 영상에 눈을 고정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하루 죙일 그 생각 뿐이다. 결국은 밖에 나가 운동을 하고 지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완전히 방전되어서야 하루의 절반을 망쳤다는 생각에 자책으로 하루를 마무리 한다.



그리고 어느 날, 또 한 시간이 넘게 짖어대는 윗집 개 때문에 결국은 못참고 집에 굴러다니던 자기계발서 한 권을 집어들고 집 근처 카페로 도망쳤다. 맛없는 아메리카노를 눈 앞에만 두고 책을 한참 읽었다. 긍정적인 감정에 집중하는 방법과 그 이유,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에 대처하는 마인드셋 같은 것들이 나왔다. 그 중에서, 부정적인 과거의 기억, 부정적인 감정에 대처하는 마인드셋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저자의 말이 나왔다. 읽으면서도 '뭔 개소리여, 잘못은 내가 한 게 아닌데!'를 수없이 되뇌었다.



책을 읽다가, 깨달음을 강제로 얻어버렸어요..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외부 상황, 흘러간 과거가, 이미 일어난 일은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과거를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다.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배울 수도 있고, 새롭게 깨달을 수도 있다.


대충 이런 내용으로 챕터가 마무리 되었고, 한참을 같은 챕터를 읽고 생각하다가 결국은 저자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라. 초인적인 인내력과 예민함을 가라앉혀 준다는 작은 알약의 힘을 빌려도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이런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내 불행의 절반 쯤이 덜어지는 기분이다. 내 앞에 있는 커피는 더 이상 맛없어서 못먹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각성을 위해서 마셔야 할 카페인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렇게 장한 일은 글을 써서 남겨줘야 한다 싶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선 풉, 하는 실소도 새어나온다. 아이고, 니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다니, 너 자신부터나 실컷 아끼고 좀 사랑해줘라.

세상 성가신 것들과 나의 예민함에 대해서 글을 쓰다보니 어느새 좀 둥근 사람이 된 것 같다. 모나지 말고 둥글게 뻗어나가라는 내 이름의 뜻처럼 살 수 있는 날이 드디어 나에게도 오는걸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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