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로 가자

by 지한

반팔에 긴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는데 팔에 닿는 햇볕이 어제만큼 따갑지 않았다. 목 뒷덜미를 스치는 바람도 제법 까슬까슬하게 느껴졌다. 여름이 옅어지고 가을이 훅 다가올수록 나는 속으로 주문을 건다. 확 추워지라고. 꽁꽁 싸매고 다녀서 눈만 내놓고 다닐 수 있게.


아무것도 수확하지 못한 채 결실의 계절을 보내는 백수의 의자는 가시방석이다. 중학교 때 산 것 같은 이 고문장치는 언제 쿠션이 꺼졌는지도 몰라서 허리는 작살날 것 같고 의자에선 맨날 검은 고무가 삭아 떨어진다. 오늘도 알바 면접에선 곧 취업하실거니까 같이 일을 하기는 어렵겠다는 말을 들었고, 입사지원한 회사에선 4번의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쇼미더머니였다면 불구덩이 속으로 다섯 번을 담금질 당했단 말이다.

억울하게도 단단해지지는 못했다. 오히려 은은하게 우울감만 남아서 윗집의 층간소음과 개짖음에도 항의하기가 귀찮아져버렸고, 나를 위해서 밥을 차린다는 게 귀찮아져버려서 그만 냉수 한 잔으로 저녁을 때워버린다. 한 두번 있던 일도 아니지만 겪을 때마다 적응이 안되고 시간이 지날 수록 회복탄력성도 바닥나는 것 같다. 나를 위한 위로도 할 수 없는 지금은 그냥 나를 조용히 가만히 내버려둔다.


가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웅크리고 앉아있어도 봤다. 한 5분쯤 지나서 좀이 쑤셔오면 겨울잠을 자는 짐승은 어떻게 몇 주, 몇 달을 이렇게 웅크리고 있는걸까 싶어서 몸을 한번 틀어보고. 겨울잠을 자는 동안엔 꿈을 꾸긴 할까, 그 꿈은 장편소설처럼 이어지는 꿈일까 아니면 천일야화처럼 짧은 이야기가 하나하나 이어지는 꿈일까. 겨울잠을 자는동안 바깥 세상을 까먹는 건 아닐까, 겨울잠을 깨고나서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활동하려면 그들도 용기가 필요할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이어지다가, 다시 한 번 나의 꼬라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봤다. 정신 차려야겠다. 서른이 되더니 중2병이 두 배로 깊어졌다.


혼자 웅크리고 있어야 할 때에 오히려 누군가 니 맘 안다며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안아줬다면 신세 한탄을 하며 엉엉 울었을 것 같다. 한참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쳐박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어깨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뻗어서 기지개를 켜면, 몸이 시그널을 보낸다. 너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으니, 어서 움직여서 부엌으로 가서 배를 대충 채우고 책상 앞에 앉아서 새 입사지원서를 쓰라고. 당장 니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몸을 움직여야 쓸데없는 자책을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그렇게 다행스럽게도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일상을 작은 성취들로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나에 대한 기대도 은근히 해보고 좀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적어도 방금 전보다는 낫지 않겠나 싶은.


중고신입이란 딱지를 붙이고 취업시장을 전전하다보니 올해 취준기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최종면접까지 갔다가 떨어지기를 수 차례 반복하다보니 내가 결정적인 한 방이 없는 사람인 건 알겠는데, 그걸 어찌 채워야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게 채운다고 채워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더 지나면 회사가 예상하는 나의 근속연수는 점점 더 짧아질테고, 자격증의 유효기간도 얼마 남지 않을텐데 그러다보면 내 생산성이나 쓸모 있음은 좀 더 낮게 평가되는 것이 아닌가.


요즘은 비슷한 이유로 리퍼샵도 잘 안쳐다보게 된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생겨먹었고 어쩌다보니 스크래치가 좀 있을 수도 있지, 그것 때문에 반씩이나 후려쳐서 팔리게 되다니 어쩐지 남일 같지가 않다. 이렇게 사물이나 동물에 감정이입을 깊게 하는 걸 보니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사람 친구를 좀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아직도 나는 웅크리고 있을 날들이 몇몇 남아있을 것 같아서 올해는 겨울이 좀 빨리 와서 느리게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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