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양손잡이입니다.
‘툭’
“아,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했습니다. 왼쪽 끝자리를 사수하지 못한 제 잘못이었으니 말입니다. 정확히는 모두가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집을 때, 저 혼자만 왼손으로 숟가락을 집었으니 말입니다.
태어나보니 저는 왼손잡이였고, 태어난 곳은 확연히 오른손잡이를 위한 세상이었습니다.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오른손잡이었기에 사회는 당연히 왼쪽보다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죠. 필기의 방향도, 도구의 사용도, 생활수단의 이용도, 사회적 약속도 대개 오른손잡이를 위해 고안된 것들입니다. “손목을 그렇게 꺾어서 써?” “공책을 그렇게 꺾어서 써?” 손목이든 공책이든 ‘그렇게’ 꺾지 않으면 공책 위의 글씨는 보이지 않을 만큼 번져 일렁였을 겁니다. 적는 왼손이 글씨를 적으면서 진하게 글씨를 훑어갔을 테니 말입니다. 제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땐 어찌나 정이 많던지 생전 모르는 왼쪽 사람의 지하철 요금을 내준 적이 있습니다. 자연스레 왼손으로 왼쪽에 있는 개찰구에 카드를 댔는데 사회가 만든 제 길은 왼쪽이 아니었죠. 멋쩍었던 기억입니다. 제아무리 예(禮)를 마음 깊이 품어도 왼손으로는 술잔도 악수도 창하면 안 됩니다. 이 사회에서 예(禮)는 오직 오른손으로만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들이미는 오른손에 왼손을 내밀면 평소엔 경험하기 어려웠던 낯선 눈초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서늘한 느낌의 눈빛이죠. ‘인권’이라는 영단어 ‘Human rights’에는 ‘맞는’, ‘옳은’이라는 뜻의 ‘right’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right’은 ‘오른쪽’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죠. 문득 궁금했습니다. 그럼 반대편인 ‘left’는 틀린 걸까요. 인간의 권리라는 것도 결국 오른쪽만을 위하는 걸까요.
그래서인지 예부터 어른들은 왼손잡이의 아이가 보이면 매를 들고 교정을 시도했습니다. 저 역시 외가의 꾸중을 들으며 자라왔죠. 사회의 대다수가 오른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사회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까, 단연 기울어진 길이 힘 받아 내려가기 쉽고, 모두가 가는 길이 얼핏 안전하고 옳게 보이니까, 사회는 왼쪽을 마냥 틀린 것처럼 오른쪽으로의 삶을 강요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저는 항상 ‘불편한 사람’, ‘특이한 사람’, ‘이상한 사람’, ‘문제인 사람’이 되기 쉬웠습니다. 다들 아무렇지 않은 곳에서 저는 불편함을 느꼈고, 모두가 저를 고치려는 가운데서 저는 소리 없이 억울함을 삼켰죠.
하지만 사실 저는 조금 극명한 양손잡이입니다. 뭐든 양손으로 능숙히 할 수 있다기 보단, 왼손으로 할 수 있는 영역과 오른손으로 하는 영역이 극명하게 나뉜 양손잡이죠. 섬세한 움직임이 필요한 영역은 왼손이 합니다. 젓가락질, 필기, 양치질 등은 오른손이 영 꽝입니다. 반면에 힘이 필요한 영역은 오른손이 합니다. 밀기, 당기기, 쥐기 등은 왼손이 영 힘을 내지 못합니다.* 완전한 왼손잡이는 아닌 조금 특이한 양손잡이인데, 그래서 오히려 이곳저곳에서 이상한 취급을 받습니다. 이도저도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이곳에도 저곳에도 섞여 들어갈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저를 더 드러내는 순간,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저를 마냥 고쳐야 하는 사람처럼 제게 훈수를 두고 화를 냅니다.
그게 요즘 참 부대낍니다. 그냥 왼쪽과 오른쪽의 경계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인지. 둘 다 고려할 수 있으면 안 되는 것인지.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도 가면 안 되는 것인지. 꼭 둘을 나누어 적대해야 하는 것인지. 그게 그리 큰 잘못인 것인지. 그게 그리 큰 문제인 것인지. 꼭 어느 곳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저를 다그치는 모습이 퍽 힘에 부칩니다. 여기도 저기도 발 하나만 걸친 채 이곳저곳에 기울이는 제 모습이 못마땅할 수도 있고, 중심이 없는 저를 보며 대신 불안함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왜인지 모두가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는 겁니다. 진실에 가까이 가기 위해 기존의 것을 회의하고 사유하고 생각하면 회당에서 이단이라며 쫓아내고, 애써 씨름하다 하늘의 신비와 경이와 순리를 받아들여보자면 광장에서 패배자라며 질타합니다. 이상을 꿈꾸면 현실에서 다그치고, 현실에 발을 맞추면 이상에서 몰아칩니다.
어디도 경계 위에 있는 자를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누구도 경계 위에 있는 자를 공감하여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경계에 위에 있는 자는 그 어디에서도 마음 편히 누울 수 없습니다. 그렇게 왼쪽과 오른쪽 사이 버젓이 자리 잡아 모두에게 별꼴인 제가 근래 퍽 서러워 깊은 새벽만 되면 잠에서 깹니다. 마음 편히 누울 곳을 못 찾아서 그런 걸까요. 그중에도 떠진 눈이 낮의 시작인지 밤의 끝인지 모르겠는 깊은 새벽이라는 게, 또다시 이도저도 아닌 경계에 걸쳐 눈을 뜨게 된 게, 마치 외로운 운명처럼 느껴져 원통할 뿐입니다.
제가 쓰고 있는 영어 이름인 Jacob(야곱)이라는 인물은 어쩌면 제 아는 인물 중 가장 극명한 양손잡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Jacob은 태어나보니 당시 문화권의 차남이었고, 차남이어서 많은 것을 장남에게 양보해야 했습니다.* 먼저 태어난 장남의 발뒤꿈치를 잡고 바로 나온지라 까짓 해봐야 1~2분 차이일 텐데, 그 찰나 때문에 많은 것을 장남에게 양보해야 했죠. 누구나 억울할 법한 일이겠지만, 당시 문화에 있어서는 충분히 자신이 겪게 된 운명을 하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법했습니다. 그런 믿음이 통용되는 사회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Jacob은 달랐습니다. 차남인 주제에 장자권을 얻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어쩌면 하늘과 운명을 거슬렀으며, 끊임없이 애썼고, 그로 인해 인생이 제법 복잡해지는 것도 감수했습니다. 그는 가고자 하는 곳엔 끝까지 가려고 애썼습니다. 가지고자 하는 것은 끝까지 가지려고 애썼습니다. 힘깨나 쓸 수 있는 오른손으로 끊임없이 씨름을 펼친 인생입니다. 그는 힘 좀 쓸 수 있다는 오른손을 가지고 일생 장자권과 씨름했고, 사랑과 씨름했고, 돈과 씨름했고, 인정과 씨름했고, 관계와 씨름했고, 축복과 씨름했고, 하늘과 씨름했고, 삶과 운명과 씨름했습니다. 어쩌면 쓴 힘만큼이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죠.
하지만 인생에 힘만이 능사겠습니까. 그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힘깨나 쓴다는 오른손만큼이나 부드러운 왼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의 뜻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겼던 인물입니다. 힘 좋은 오른손으로 하늘의 뜻과 운명에 대항할 땐 언제고 두려움에 휩싸일 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왼손으로 도망합니다. 공포에 질릴 때 어김없이 왼손을 의지하고, 제 힘이 안되면 부드러운 왼손에 의탁하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늘의 뜻과 은혜에 부드럽게 자신을 부탁하죠. 그래서 더 교활하고 더 교묘하고 더 얌체 같아 보이지만, 그 이도저도 아니었던 양손잡이 모습이, 여기저기에 기웃대던 그 양손잡이 모습이, 경계 위에서 경계를 넘어 다니며 경계를 허물었던 그 양손잡이 모습이, Jacob을 역사의 이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어쩌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어서 누구보다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후에는 자신의 이런 양손잡이 인생을 하늘에게까지 인정받습니다. 하늘에게 새 이름을 수여받는데, 그 이름은 그의 양손잡이 인생을 말해주듯 ‘하늘과 싸워 이긴 자’라는 뜻이죠.*
그는 운명과 의지의 경계를 마구 오갔습니다. 힘과 부드러움의 경계를 마구 무너뜨렸습니다. 자유와 목적의 경계를 마구 허물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마구 넘나들었습니다. 꿈에서 하늘과 땅이 사닥다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계시를 받고는 너무 다른 왼손과 오른손 사이를 마음껏 거닐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온전히 맡기지도, 온전히 우기지도 않은 얌체 같은 모습을 한 채 말입니다. 물론 그 때문인지 그는 인생 말미에 자신의 인생을 ‘험악한 인생’이라 회고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이름이 역사의 이름으로 남겨졌고, 대대로 그 이름은 한 민족의 정체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사실 이 ‘유랑’(流浪)은 경계에 걸친 제 생에 대한 일기이자 탐구이자 통곡입니다. 저는 경계에 있습니다. 경계에서 태어났고, 태어나보니 경계였고, 여러 경계를 보며, 여전히 경계를 살아가고, 삶의 여러 경계를 질문합니다. 이 ‘유랑’(流浪)은 그 경계를 속 놓아 털어놓는 한 창구이죠. 경계를 오갈 수 있는지, 경계를 허물 수 있는지, 경계와 하나가 될 수 있는지는 제아무리 모르겠지만, 보여지는 경계 위의 길을 조금씩 조금씩 더듬어 걸어가고 있습니다. 편하게 머리 누일 곳 없이 제법 고단히 말입니다.
물론 저 역시 교묘하게 이곳저곳에 발 하나씩 걸쳐놓은지라 제 크게 지치는 순간 발 하나 슥 빼어 도망하겠습니다. 그때는 ‘유랑’(流浪)이라는 이름을 과감히 버려야겠죠. 그때는 이곳저곳 정처 없이 흐르지 않고 한 곳에 굳건히 자리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물론 흐르지 않는 물이 과연 생명을 키울 수 있을지는 정답을 알면서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생의 길이 너무 막막하고 암담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감히 저만 그렇겠습니까. 모두가 제 길을 '사부작사부작' 작아도 '꾸역꾸역' 꿋꿋이 걸어가야 하는 것이겠지만, 제 속도를 걸어가는 달팽이를 보고 속이 터지는 분들이 있듯이 주변엔 흘겨보는 눈들이 참 많습니다. 그 시선을 견디는 많은 이들을 진심으로 응원해 봅니다. 저 역시도 응원을 꽤 받은 몸이라 말입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인생의 정답은 없습니다. 왼쪽도 왼쪽 나름의 길이, 오른쪽도 오른쪽 나름의 길이,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는 길이, 왼쪽과 오른쪽의 경계를 허무는 길이, 모든 경계와 함께하는 길이 다양하게 있습니다. 그럼 명료함을 구태여 성마르게 구하지 않고, 모호하여 신비로운 상태에 거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제발 너무 다그치지 말자고요. 분명 명료함과 모호함 사이를 정처 없이 흐르는 그 희미한 길이 작은 생명을 품을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유일무이의 존재로 살아가는 이곳에서 저는 한쪽엔 저의 운명을, 다른 한쪽엔 저의 의지를 붙들고 이곳저곳의 경계 위를 걸어가 볼까 합니다. 왼손은 하늘의 힘에, 오른손은 나의 힘에. 왼발은 운명에게, 오른발은 의지에게.
다시 한번, 하늘의 섭리와 질서에 왼쪽 다리 하나 맡겨봅시다. 언제든 저항할 수 있는 오른쪽 다리는 제 굳건히 가진 채 말입니다. 원래 모든 인생의 여정은 ‘외발잡이’* 인생이니까요.
모든 외발잡이를, 또 모든 양손잡이를 응원해 봅니다.
부디 너무 고단하지 않기를, 부디 너무 외롭지 않기를, 또 부디 너무 오래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창28:10-17)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엡2:14-22)
: 기존의 많은 종교는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는 종교와 성전과 사제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습니다. 거룩한 곳이 있으면 부정한 곳이 있고, 구별된 사람이 있으면 부정한 사람이 있고, 성스러운 곳에 신이 존재하지 부정한 곳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때문에 하늘과 땅이, 거룩한 곳과 부정한 곳이, 신과 인간이, 구별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이, 성과 속이, 개인과 이웃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기성 종교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찍혀 축출당하거나 배척당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죠. 예수는 신이면서 인간입니다. 하늘을 살지만 땅을 밟습니다. 자신이지만 하나님입니다. 예수는 성전도 허물고 제사장도 무너뜨리고 죄인과 의인의 가름도 지웠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것을 폐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것을 걷어치웠습니다. 성스러운 곳과 부정한 곳을 지웠습니다. 그래서 신성모독, 기성 종교(유대교)가 예수를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계를 허물었던 그 소식이 많은 이들이 거할 수 있는 '생명의 복된 소식'이 되었던 것이죠. 야곱은 경계를 허무는 복된 소식을 꿈에서 보고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생에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 마음껏 경계를 넘어 산 인물이기도 하죠. 야곱의 꿈에서 먼저 보여진 하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온전히 성취됩니다.
**明於天人之分, 制天命而用之(명어천인지분, 제천명이용지)(荀子, 天論)(순자, 천론)
"하늘과 인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라, 천명을 이해하고 그것을 활용하라." : 하늘이 자연 질서를 만들었지만 인간은 그 질서를 활용해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늘과 인간이 협력하여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天人合一(천인합일) : 하늘과 인간은 하나의 질서 안에서 함께 움직입니다. 하늘의 뜻만도 아니고 인간의 의지만도 아닙니다.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 문화는 장남이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회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 중 두 몫을 받을 수 있는 특권도 장자에게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과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계승자 역시 자연스럽게 장자에게만 허락된 축복으로 이해되는 사회였습니다.
****야곱이 하늘로부터 새로 부여받은 이름인 이스라엘은 '하늘과 싸워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저 역시 저만의 해석을 붙이고 싶네요. 고집스런 오른손으로 하늘과 겨루다가도 정 안될 땐 부드러운 왼손으로 도망쳐 아비에게 의탁하는 모습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죠. 여기서 자식이 되려면 우선 애완이면 안 됩니다. 자기 의지가 있어야죠. 때론 부모를 죽이고 밖으로 나서야죠. 자주적이고 독립적이 되어야죠. 그게 건강한 부모 밑에 있는 살아 있는 자녀죠. 하지만 때론 등 뒤에 계신 부모를 의탁할 때도 있어야죠. 어린 자녀가 까짓 해봐야 얼마나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라면 이 모습도 있고 저 모습도 있어야 하는 겁니다. 양손잡이, 외발잡이. 그게 자녀 아니겠습니까. 하늘은 그런 교활하고도 미운 자녀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부모 밑에 있는 살아 있는 자녀에게 하늘은 '하늘과 싸워 이긴 자'라는 이름을 허락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와 싸워 이긴 자녀'라는 이름처럼요. 이런 미운 자녀에게 기꺼이 져준 하늘을 참 부모입니다.
*****개인적으로 인생의 여정을 ‘외발잡이’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이제 삼십에 조금 더 먹은 어리숙한 인생이지만, 제 지금껏 쓰리게 경험하고 배운 인생이 그럴듯합니다. 저는 바로 걷기 위한 양발 중 한 발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발잡이죠. 그래서 제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걷기 위해선 다른 쪽 발과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가령 제가 왼쪽으로 가고 싶어 제 가진 왼발을 왼쪽으로 디뎌도 오른쪽 발이 따라와 주지 않으면 왼쪽으로 바로 걸을 수 없습니다. 이는 오른쪽 발이라는 환경이, 이웃이, 운이, 뜻이, 하늘이, 때가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겠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환경이, 사람이, 운이, 뜻이, 하늘이, 때가 오른쪽으로 가고 싶다고 먼저 오른쪽 발을 내디뎌도 제가 오른쪽으로 가기를 원치 않으면 제 왼발을 내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제 아무리 환경이, 이웃이, 운이, 뜻이, 하늘이, 때가 오른쪽으로 저를 이끌어도 저는 오른쪽으로 갈 수 없는 것이겠지요. 하늘이 열어준다고 우리에게 선택권조차 없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환경이 열리면 그냥 숙연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는 권리가 모든 생에 있다는 겁니다. 비록 본래에 받은 명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의 영역이 분명한 양손잡이처럼, 왼발과 오른발도 각기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이 있겠죠. 그 경계를 이리저리 넘어도 보고 허물어도 보고 하나도 되어 봅시다.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