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아서 이해하는, 달라서 채워주는

당신은 어때요?

by JACOB


선생님은 만나자마자 여러 이야기를 가볍게 던졌습니다. 제가 소개해 준 후배에게 이러저런 따듯한 말을 건네줬다는 얘기, 헤어질 땐 작은 돈봉투를 쥐어줬다는 얘기, 좋은 인연을 소개해주어 고맙다는 얘기, 여기 곱창전골이 맛있다는 얘기. 멋쩍게 웃으며 듣고 있지만 사실 아까부터 꽤 긴장한 상태입니다. 선생님의 애정 어린 말이 언제 어떻게 쏟아져 박힐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연초에 보기로 했었는데, 독감 때문에 봄내음이 흠씬 풍기는 날이 돼서야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독감이 문제가 아니었나 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미루고 싶었나 봅니다. 차마 더 미룰 순 없었는지 지금도 후회가 될 정도로 말입니다.


세 딸밖에 없는 선생님은 제가 아들 같아서 여러 조언을 수놓았습니다. 제 중학교 때부터 지속된 인연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하지만 제 소개해준 사람들에게는 좋은 이야기와 돈봉투까지 쥐어줬다는데, 왜 저에게는 ‘안 되겠다’는 식의 얘기만을 늘어놓는 건지, 아들 같은 제자는 이미 상황을 예상했음에도 서럽습니다. “인생에는 제 때라는 게 있는 거야.” “말하는 것보단 듣는 게 중요해” “이젠 네게 함부로 말을 못 할 거 같아.” “네게 고집이 생긴 걸까?” “너무 안전하고 싶은 거 아니야?” “계속 어린 상태로 있을 거니?” 함부로 얘기하지 못할 것 같다 하셨지만, 기억에 하나하나 다 남을 정도로 선생님의 말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틀린 말이 없는 것 같아 슬펐고, 맞는 말만 하시는 것 같아 아팠습니다. 듣다 듣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아 내서는 안 될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습니다. “원래 경계에 있는 사람이 제일 외로워요.” 말을 뱉음과 동시에 ‘아차’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때다 싶어 옥타브를 한 톤 높여 함부로 하지 못할 말을 다시 쏘아댔습니다. “그러게 누가 골방에 들어가래?” “누가 혼자 들어가 외로우래?” “답답해 죽겠어.” “방에서 나와” “우리 딸도 그래, 아빠가 이러이러해준다니까 혼자 스스로 방에 들어가. 그럼 나도 아무것도 못해 ……” 눈 밑까지 차올랐던 눈물을 있는 힘껏 당겼습니다. 떨어지려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눈물조차 아까워 어금니를 꽉 물었습니다. ‘나쁜 생각.. 나쁜 생각.. 나쁜 생각..’ 조금이라도 착했다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나쁜 생각을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끓여낸 나쁜 생각을 속으로 외쳤습니다. ‘차라리 허리띠로 훈육할 아들을 낳지 그랬어요!!’


촛불만을 의지한 깊고 어둔 방, 일기장 앞에 경건히 앉아 선생님의 말을 곱씹기 시작했습니다. 듣는 내내 서러웠지만 스스로 알았던 거겠죠. 사실 선생님의 말에 틀린 건 없었습니다. 모두 옳은 말 투성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모든 말이 제 상황에 모두 맞았고, 저는 너무 맞아서 당연히 아팠습니다. 선생님은 약한 저와 달랐습니다. 문제를 어떻게 넘는지 알았고, 같은 문제를 본인은 너끈히 넘어왔고, 저와는 달리 경험도 통찰도 능력도 요령도 깊었습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말해줬습니다. 도움이 될 거라 거침없이 알려줬습니다. 채워줄 수 있을 거라 거침없이 넣어줬습니다. 저도 압니다. 저도 아는데 저는 아팠습니다. 선생님은 옳았습니다. 선생님은 옳았는데 저는 외로웠습니다. 저도 아는데, 선생님은 옳았는데, 아무리 곱씹은들 제 일기장은 아픔과 외로움으로만 가득 채워졌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꼬운 아이에게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을 받고, 만나러 가는 길부터 뛰어오는 아이를 제 품에 품는 순간까지 얼마나 걸렸는진 모르겠습니다. “쌤!” 아이는 여전히 맑았고, 저는 아이와 닿자마자 놀랍도록 차분해졌습니다. 찰나였는데 말이죠. 저희는 항상 가던 카페로 향해 항상 마시는 음료를 마시며 이러저런 담소를 나눴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역시 긴장했습니다. 이 밝음 뒤에 털어놓을 아이의 어두운 시간을 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내 아이는 하나둘 자신의 쓰린 이야기를 조심스레 올려놓았고, 저는 묵묵히 듣기만 했습니다. 제 코가 석자인지라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얘기를 마친 아이는 저를 물끄러미 쳐다봤고, 할 말이 없던 저는 그저 애정 어린 웃음만을 띠었습니다. 아이는 제 웃음을 보더니 쌤처럼 너끈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너끈하다뇨. 그럴 리가요. 꽤나 들었던 말임에도 그날은 유독 그 말이 불편했습니다. 오죽 제 발이 저린 것인지,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모아 한평생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제 날 것의 일기 한 부분을 펴 아이에게 슬쩍 건넸습니다. “괜찮으면 한번 읽어볼래?”


그저 밝고 깊고 넓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그만한 골짜기가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을 뿐인데, 아니 사실 저는 그리 너끈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려고 했을 뿐인데, 제 일기를 읽은 아이의 반응이 저를 심히 당혹케 했습니다. 고개 숙여 천천히 일기를 읽는 아이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미리 장전했건만, 정작 아이의 고개가 들리고 아이와 눈이 맞자 아이의 눈에선 옹골차 반짝이는 눈물이 무겁게 떨어졌습니다. 어쩌죠. 저는 이미 장전한 어색한 웃음을 뱉어버렸는데요. 아이는 눈에 휴지를 마구 비비면서 연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쏟아지는 눈물을 꾹꾹 눌러댔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일기에 쏟은 제 눈물이 아이의 눈에서 다시 애처롭게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애써 어떤 얘기도, 에둘러 어떤 위로도 서로 건네지 않았습니다. 잠시 시간을 두고 인생의 골짜기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눴지만, 모두 빠르게 휘발될 얘기임을 직감하고 말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그 순간 아무 말도 붙이지 않았지만, 아무 위로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 해결도 내놓지 않았지만, 닿았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제 어둠이 아이의 어둠에 닿아 위로가 되었고, 아이의 어둠이 제 어둠에 닿아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느꼈습니다. 어쩌면 지금 제 어둠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저 멀리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빛이 아니라, 그저 제 옆에 묵묵히 같이 있는 어둠일지도 모르겠다는 질문(質問)을 말입니다.


사실 아이가 겪은 어려움은 제게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아이가 겪는 고통에 대해 제가 이러저러 말해줄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겪는 어둠을 저 역시 오래전에 겪은 바 있었고, 저는 이미 잘 넘어왔고, 이제는 그 시기를 어떻게 이기는지 방법까지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미 경험해 본 바 있어 아이보다 그 문제에 대해 월등했던 저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저의 어둠을 드러내는 쪽을 택했습니다. 어둠과 문제 앞에 무능함을 느끼는 너만큼 무능한 나를 꺼내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무능했던 저를, 무능한 저를 말입니다. 아이의 문제에 있어서는 충분히 유능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넉넉히 해결하는 사람으로 있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애써 무능을 택했습니다. 애써 부끄러움을 보였습니다. 굳이 제 무능을 드러냈습니다. “나도 못해.” “나도 몰라.” 그런데 제가 드러낸 그 ‘나도 못해’와 ‘나도 몰라’의 무능이 “나도 같아.” “내가 같이 있을게.”로 전해질 줄은 제 감히 어림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촛불만을 의지한 깊고 어둔 방, 멍하니 일기장 앞에 앉았습니다. 무능이 위로가 되었다는 게, 무능이 공감이 되었다는 게, 무능이 연대의 방식이 되고, 무능이 사랑이 되었다는 게 결연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정말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입으로 소리 내지 않아도 억울함은 꼭 하늘에 토로해야 하는 성격인지라, 정신을 차리고 이내 일기장을 펼쳐 매섭게 쏘아대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무능해야 위로가 됩니까.’ ‘왜 아파야만 공감이 됩니까.’ ‘멀리서는 안다고 할 수 없는 겁니까.’ ‘빛나면서는 같다고 할 수 없는 겁니까.’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있는 것이 정말 사랑일 수 있는 겁니까.’ ‘그게 사랑의 방식이 될 수 있는 겁니까.’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않는 겁니까.’

충분히 유능할 수 있어도 애써 무능한 모습을 앞으로 내밀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게, 그 모습이 감히 사랑과 가까워 보이는 게 여전히 불편합니다. 여러분은 어디가 사랑에 가까운 쪽인 것 같습니까? 같아서 이해하는 쪽입니까? 아니면 달라서 채워주는 쪽입니까? 세상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도 없고, 모든 것을 통섭하는 정답도 없지마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뭐가 사랑일까요. 저는 사랑을 할 때, 사랑을 찾을 때, 사랑을 지향할 때 무엇을 봐야 할까요. 같아서 이해하는 쪽과 달라서 채워주는 쪽. 제가 느끼는 사랑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요.



“전 그 어둠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한 책에서 발견한 문장인데 어떤 코멘트도 없이 밑줄을 쳤습니다. 이상하게 친숙했고, 이상하게 정겨웠고, 이상하게 공감됐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빛과 함께한 시간보다 어둠과 함께한 시간이 더 많을 겁니다. 돌이켜보면 반짝이고 찬란한 시간은 분명 강렬했지만 항상 짧았죠. 빛은 지나가버리는 것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빛은 오지만, 갑니다. 빛은 강렬하지만, 생각보다 우리를 자주 버리죠. 빛은 언제나 우리를 통과합니다. 그게 빛의 속성이라면 속성입니다.

하지만 어둠은 빛이 버린 우리를 언제나 품어줍니다. 빛에 버려진 우리를 오래 덮어줍니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 소리 없이 들어와 언제나 그랬듯 우리와 또 함께해 줍니다. 어둠은 쉬이 외롭게 느껴지지만, 사실 그 어떤 것보다 우리에게 함께를 속삭입니다. 비참할 때도, 무능할 때도, 막막할 때도, 외로울 때도, 두려울 때도, 아플 때도 어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내내 우리에게 함께를 가르치죠. 이렇게 생각하니 실상은 빛에게 버림을 받아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지, 당장에 우리를 품어준 어둠은 영 잘못이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긴다는 말처럼 빛에게 버림받아 놓고, 당장에 옆에 있는 만만한 어둠에게 너 때문에 외롭다고 화풀이를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사실 어둠은 제일 정겨웠을 뿐인데요. 사실 어둠은 그저 우리 옆에 같이 있어줬을 뿐인데요. 사실 어둠은 빛나지 않고 우리처럼 무능히 있었을 뿐인데요. 우리 같이(처럼) 말입니다. 우리와 같이(함께) 말입니다. ‘같이’, 또 ‘같이’ 말입니다.


아직 명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제 어둠에 끌리는 이유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어둠은 저와 같습니다. 그리고 자주 저와 같이 있어줍니다. 저와 비슷해서 저와 함께 있어줍니다. 제 옆에서 저를 이해해 줍니다. 조용히 우리 있는 곳에 와 우리를 품어줍니다.


언제는 반짝이는 쪽에 서봤냐 싶지만, 앞으로도 어두운 쪽에 서볼까 합니다. 굳이 택하자면 저는 계속 어둠에 있겠습니다. 달라서 채워주는 쪽보단, 같아서 이해하는 쪽에 있겠습니다. 말하면서도 벌써부터 고역이겠네요.

제 이름엔 ‘벗 우’(友) 자가 있습니다. ‘벗 우’(友) 자는 ‘또 우’(又) 자를 나란히 겹쳐 놓은 글자죠. 벗은 너와 같은 나, 곧 같은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이죠. 같은 우리가 같이 있는 겁니다. 그게 친구요 우정이요 벗입니다. 벗이 있으면 그래도 괜찮지 않습니까. 비록 지나는 길이 어둠이어도 함께면 그래도 견딜만하지 않습니까. 함께면 가난하게 먹는 라면도 꽤 맛나지 않습니까. 함께면 그래도 위안이 되지 않습니까. 함께면 낮도 밤도 그리 적적하진 않지 않습니까.

네가 나와 다르지 않아 다행입니다. 네가 나와 달리 화려하게 빛나지 않아 좋습니다. 같은 우리가 같이 있다는 게 보기 참 좋습니다.


여전히 사랑이 뭘까. 제가 보고 싶은 사랑은 어느 쪽에 있을까. 나와 같아 나를 이해하지만, 또 나와 달라 나를 채워주는 완벽한 사랑은 없는 걸까. 둘을 다 해결할 순 없는 걸까. 정도를 너무 크게 잡고 있는 걸까. 욕심이 과한가. 거기까진 못하는 걸까. 정말 많은 생각이 듭니다. 애매하게나마 정답을 내리다가도 이내 다시 흐릿하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여러분은 명확하게 정답을 내려줄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박수 칠만한 정답을 내려줄 수 있겠습니까? 완전무결한 정답을 제시해 줄 수 있겠습니까? 흠 하나 없이 반짝이는 정답을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없다면, 좋습니다.

저와 같네요.

우리 ‘같으’니까, ‘같이’ 가시죠.


계속. 오래.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말하기를 아,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 해도,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시139:7-12)

“그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26:52-54)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고후12:8-9)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4:15)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8:9)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2:6-8)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8:26)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3-28)

: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1:5)는 전통적인 관념이 있습니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결코 반짝이고 높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낮은 곳, 더 더러운 곳, 더 약한 곳, 더 억울한 곳, 더 아픈 곳에 자주 계시죠. 성경 속 성육신을 봐도, 성경 속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봐도 하나님은 대개 그렇습니다. 그게 하나님 당신의 방식이죠.

**知其白 守其黑 為天下式(지기백 수기흑 위천하식)(老子, 道德經)(노자, 도덕경)

“밝음을 알되 어둠을 지키면 세상의 본보기가 된다.”: 노자는 밝음과 명예, 드러나는 것보다 어둠과 낮음, 감추는 것을 택하는 것이 덕이라고 말합니다.

德不孤 必有鄰(덕불고 필유린)(孔子, 論語)(공자, 논어)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獨樂樂 不如與人樂樂(독락락 불여여인락락)(孟子,梁惠王)(맹자, 양혜왕) “혼자 즐기는 즐거움은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만 못하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