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이 머문 자리, 밤이 남긴 무늬

왔네요, 당신.

by JACOB


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설레는 표정으로 티백을 하나 건넸습니다. 이게 뭔가 싶었는데 녹차 모양의 책갈피였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책갈피가 저와 어울려 하루빨리 사서 주고 싶었답니다. 힘든 일을 토로할 곳이 없어 저를 찾은 줄 알았는데요. 설날이 껴서 택배가 늦었다는 둥, 받자마자 연락한 것이라는 둥, 아버지 눈치를 봤다는 둥 이러저러 얘기를 늘어놓는 거 보니 정말 선물이 목적이었나 봅니다. “센스 죽이죠?!” “센스 미쳤죠?!” 자신의 선물 고르는 센스가 어떻냐고 들떠 얘기하는 아이가 사랑스러워 행복해졌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줬다면 그리 감탄할 만한 디자인은 아닌데 말입니다. 사실 저는 녹차도 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항상 말차 라떼를 마시길래 저도 아이 따라 말차 라떼를 마셨을 뿐입니다. 아이는 행복한 표정으로 쌤이 녹차, 말차, 책을 좋아하니까 녹차 디자인을 골랐다고 합니다. 이제 녹차가 좋아질 것 같습니다. 저는 책갈피에 아이의 이니셜을 적어달라고 했습니다. 소중히 간직해야죠. 아이가 건넨 녹차와 그 위에 살포시 적어 놓은 아이의 이름을 말입니다. 아이가 건넨 녹차를 따라 봄이 닥쳐왔고, 저는 미처 대비도 못한 채 따듯한 녹차와 봄을 겪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꽤 자주 우는 편입니다. 꽤 자주 겨울을 나는 것 같고요, 꽤 자주 밤을 거니는 것 같습니다. 애통하고 춥고 외롭고 막막한 나날들에 자주 거하는 편입니다. 낮 못지않게 밤과 가까이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모두가 우연과 필연 속에 자연스레 찾아오는 밤을 경험하게 되지만, 저는 낯선 밤으로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게 눈물 흘려라 아프면서도 일생 눈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큰 편이죠. 구체적인 기한을 정해놓고 그때까진 철저하게 방황하기를 다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제 풀에 지쳐 그 기한을 다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밤이 제게 오는 만큼 저 역시도 스스로 밤을 찾는 편입니다. 누가 보면 밤을 좋아하는 줄 오해할 법할 만큼 말입니다.


이는 밤의 별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겨울의 찬가를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눈물 속 반짝이는 보석을 발견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겨울밤이 참 춥고 아프고 시리고 마르고 갈라지지만, 겨울밤이 기르는 것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겨울밤만이 기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단맛은 겨울에 듭니다. 일생 흔들려야 뿌리 채 뽑히지 않고요. 잡광 하나 없이 어두운 곳에서만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는 별의 존재가 있습니다. 차디찬 냉기 위에서야 피어나는 생명의 숨결이 있고, 보이지 않아야 움트는 상상과 창의가 있습니다. 깊은 골짜기는 높은 봉우리로 가는 도약점이 됩니다. 아픔이 없으면 창조도 없습니다. 무통분만의 시대는 필요한 것을 생산할 뿐이지, 생명을 낳아 창조하지 못합니다. 아픔과 눈물과 죽음이 진정 생명을 깊이 만지고 데우고 높이는 법이죠


물론 때론, 아니 어쩌면 꽤 자주. 깊이는 꼭 아파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인지 불만을 토로할 때가 있습니다. 낯선 곳으로 자신을 던지지 않으면 정녕 넓어질 수 없는 것인지, 눈물 없인 심연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인지 자주 억울해합니다. 밤의 값어치를 알아도 춥고 아프고 시리고 마르고 갈라지는 고통은 어제나 오늘이나 견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넓어지면 도대체 얼마나 넓어지려고. 까짓 깊어지면 제 얼마나 깊어질 수 있다고. 스스로 고생을 자처하는 모습이 혹 다른 모습의 회피는 아닌지 최근 부쩍 흔들리기까지 합니다. 밤의 가치를 잘 알지만, 혹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요. 정녕 깊이는 밤만이 기를 수 있는 영역일까요. 쓸쓸한 달빛만이 길러내는 눈물 외에도 깊이를 만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불확실함까지 등에 업은 밤은 솔직히 피하고만 싶습니다. 뒤돌았을 때 발견할 수 있는 가치는 제 아무리 빛날지라도 당시엔 누구에게나 지옥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스스로를 몰아세우시는 거 아니에요?” 선물에 들뜬 나머지 너무 제 얘기를 했나 봅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미련하게 겨울밤을 찾고 있는 제 진솔한 얘기를 말입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아이에게 저는 밤만이 기를 수 있는 영역을 구구절절 소개했습니다. 저 역시도 부쩍 흔들리는 중에 어떻게든 저를 정당화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제 말에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말 설득이 돼서 끄덕인 것인지, 아니면 흔들리는 제 입술을 봤기 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정적, 저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아이는 동트는 새벽 눈망울로 다시금 입을 뗐습니다. “근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쌤은 이미 좋은 사람인데.” “쌤이 되고 싶은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요?”

돌연 바람이 불었습니다. 제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아이의 입이 아니라, 제가 쓸쓸한 밤을 더 보내지 않았으면 하는 아이의 눈을 타고 봄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순간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좋은 사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웃었습니다. 제 웃음이 번져 아이도 웃었습니다. 같이 웃었습니다. 이후 아이의 질문에 제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다만 이후 우리의 대화는 실없는 웃음들이었습니다. 깊이 없이 그저 무용했을지도요. 예기치 않은 때에 가벼운 꽃바람이 불어 닥쳤고, 저는 아이가 실어온 봄을 온몸으로 맞았습니다. 깊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달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높은 산이 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이리도 다정하고 따듯한 걸요. 원래 오름직한 언덕이 다정하기도 한 것입니다.


얼마 전 어디선가 3월을 ‘겪는 달’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3월을 맞이하게 되면 모두 하나같이 “벌써 3월이 왔느냐”는 말을 내뱉습니다. 이후 따라오는 한숨은 덤이죠. 모두가 미처 대비도 하지 못한 채 3월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 보면 인생은 모두 닥쳐오는 것 같습니다. 뭐 모르는지도 모르게 겪어내는 것이 인생 앞에 선 우리겠지요. 3월도, 새로운 달도, 오늘의 햇빛도, 거칠게 쏟아지는 비도, 솔솔 부는 바람도, 캄캄한 어둠도, 슬며시 자리한 봄내음도, 손끝 시린 음악도, 막히는 일도, 풀리는 글도, 방금 마주한 그대들도, 사랑도, 당신도, 새벽도, 모든 새하루도 모르는지도 모르게 닥쳐옵니다. 우리는 그저 겪죠. 그중에는 제 원하는 것도 제 원치 않는 것도 있습니다. 뭐 이거나 저거나 마음대로 오시니 저희는 얼빠지게 겪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리저리 오르내리며 덮쳐오는 생의 갖은 너울을 함께 맞아봅시다. 예상치 못해 걱정이지만, 또 제 원하는 것만 찾아오지 않아 불안이지만, 모든 게 제 모르게 닥쳐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린다고 오지 않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겨울도, 봄도, 생도, 내일도, 우리네 인생도 말입니다. 그럼 그저 때에 맞게 모든 걸 아우르는 게 지혜겠습니다. 분명 낮에만 자랄 수 있는 것이 있고, 밤만이 기를 수 있는 것이 있으니, 하늘의 섭리와 질서에 왼쪽 다리 하나 맡겨봅시다. 언제든 저항할 수 있는 오른쪽 다리는 제 굳건히 가진 채 말입니다.


너무 당황하진 맙시다. 갑작스레 찾아온 봄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에 너무 흔들리지도 맙시다. 햇빛으로 말린 찻잎도, 달빛으로 말린 찻잎도 제각기 깊은 향을 품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깊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저는 어떤 좋은 사람이고 싶고, 어떤 깊은 사람이고 싶은지 잘 모르겠지만, 촛불은 어둠과 빛이 함께 있어 공간에 깊이를 채웁니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깊이는 어둠과 빛을 함께 품어야 생기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어느덧 어딘가 부족한 2월을 접고, 3월을 새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 어느 것도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녹차를 따라 흘러 들어온 봄향만을 만끽해 볼까 합니다. 아직 사랑스러운 봄내음이 향긋하게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찾아나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전3:1-9)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천장강대임어시인야, 필선고기심지)(孟子, 告子下)(맹자, 고자하)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고 수고를 시켜 성질을 단련시킨다."

莫之為而為者 天也, 莫之致而至者 命也(막지위이위자 천야, 막지치이치자 명야)(莊子)(장자)

“누가 그렇게 하게 한 것이 아닌데 그렇게 되는 것은 하늘이고 누가 이르게 한 것이 아닌데 이르게 되는 것은 운명이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