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버지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습니다.
아꼬운 아이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위급한 일이 있는 거겠죠. 위급할 때만 저를 찾아 미안하다 말할 정도로 아이가 가져오는 소식은 번번이 제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아이는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속상한 마음을 함께 나누고, 언제나처럼 함께 울고, 함께 머리 싸매며 최선을 찾았습니다. 저희는 이러저런 얘기를 함께 나눴습니다. 아끼는 만큼 가볍게 뱉지 않았고, 아끼는 만큼 최선을 찾아 말했고, 아끼는 만큼 아이가 아파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허나 그 아끼는 마음이 문제였을까요. 돌아오는 아이의 말이 덜컥 제 마음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더 싫어요.” 잠시 숨이 멎었습니다. 의연한 척했지만 몸에 긴장이 퍼졌습니다. 아프지 않기를 바라 건넨 말이 정말 아이를 위한 말일까 기시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내 이러저러 부드러운 얘기를 계속 이어갔지만, 제가 속으로 외치는 말은 달랐습니다. ‘나를 죽여라.’ ‘너는 나를 죽여야 해.’ ‘나를 죽여. 그래야 네가 살아.’
우리 사는 세상이 누군가 만들어 놓은 거짓 세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뭐, 저도 딱히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재의 이야기는 주변에 참 많죠. 세상 모든 것이 TV 각본과 세트장이었던 영화 <트루먼쇼>,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물질세계가 아닌 정보세계 속에 살고 있었던 영화 <매트릭스>, 벽 안쪽 가축과 다르지 않은 삶에 혐오감을 느끼며 벽 밖의 자유를 선망하는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풍족한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땅으로 뛰쳐나간 성경 속 <탕자 이야기>, 또 성경이 말해주는 태초의 인류 이야기 <아담과 하와> 등 갇힌 세계관에서 시작하는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갇힌 세계관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불편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는 이 세계관을 가진 이야기가 공통으로 전개하는 흐름이 대변해 줄 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야기 속 중심인물들이 자발적으로 그 세계를 뛰쳐나갔다는 것입니다.
왜 뛰쳐나갔을까요? 분명 각본대로 짜인 TV 속 세상이 안전을 보장해 줬을 겁니다. 정보세계가 물질세계보다 덜 위험했을 겁니다. 벽 안쪽 생활이 그리 나쁘진 않았을 거고, 풍족한 아버지의 집은 큰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삶이 대개 평안했을 겁니다. 그 안에서 적당한 존재로, 적당히 먹고, 적당히 어울리고, 적당히 돌보고, 적당히 경작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혹 열심을 낸다면 안쪽 나름의 의미 역시 다양하게 발견할 수 있었겠죠. 그럼 그 안에 있는 것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 안에 있는 게 더없이 안전하고 평화롭지 않겠습니까? 왜 이야기의 중심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보호와 평화의 울타리를 제 발로 뛰쳐나갔던 걸까요? 그 밖은 당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그 밖은 위험과 고통을 수반한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Biophilia,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자연히 살아 있는 것에 매료되고, 살아 있는 것은 본성에 살아 있기를 선망합니다. 생명은 당연히 살고자 합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의 본능이자 속성입니다. 그래서 갇힌 세계에 살았던 주인공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세트장을 나갔고, 진실을 알게 되는 빨간약을 먹었고, 칼을 들고 벽을 넘었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홀로서기를 했으며, 자신도 하나님처럼 더 큰 존재가 되기를 소원하며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주체적으로 미지의 영역을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그들 모두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넓은 하늘을 향해 뛰쳐나간 겁니다.
제 세계가 아닌 곳에서 애완(愛玩)*처럼 사는 것은 싫습니다. 안전하게 잘 짜인 곳이라 할지라도 저는 어느 만들어진 집에 사는 애완이 아닙니다. 나는 나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 스스로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고, 내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그들은 모두 떠납니다. 알 수 없음으로 뒤덮인 미지의 세계는 분명 모호하고 불안하고 독립적이지만, 그렇기에 비로소 ‘내 살아 있음’이 됩니다. 그렇기에 비로소 ‘내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자주적일 수 있는 하늘이 진짜 내 하늘이 되는 법입니다. 자유로울 수 있는 하늘이 진짜 넓은 하늘이 되는 법입니다. 살아 역동하는 것이 꼭 찬란함을 약속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선망하고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역동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일 뿐입니다. 보호와 평화의 울타리를 자발적으로 뛰쳐나간 그들은 결코 이상한 게 아닙니다. 영화 속 수많은 인물 중 중심이 되는 인물은 정작 울타리를 뛰쳐나간 그 별난 이들이 아닙니까? 정작 우리는 그 별난 인물들을 통해 마음의 울렁임을 받지 않습니까? 그들은 살기 위해 뛰쳐나간 것이고, 살아 있기에 그들은 뛰쳐나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우리는 살아 있는 그들을 선망하고, 살아 있는 그들에게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저는 아버지께 7장의 손 편지를 부쳤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저는 아직 살고 싶습니다.’였습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제 아이를 아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저를 너무 아낀 나머지 제가 적당히 순탄한 길을 가기 원했습니다.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직장에 들어가, 적당히 돈을 벌어, 적당한 가정을 꾸리며, 적당한 존재로 위험하지 않게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저를 아끼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저를 너무 아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적당한 벽 안에서 적당한 존재로 적당히 살기를 바랐습니다. 제 아이가 보호의 울타리 밖 넓은 세계의 위험을 마주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제 아이가 평화의 울타리 밖 미지의 세계 속에서 고통을 마주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제 아이가 그래도 쉬운 길을 선택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알았고, 아버지는 제게 그 마음을 표현했지만, 저는 눈물 먹은 편지를 통해 저를 아끼는 아버지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습니다.
어느새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꼬운 아이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때마다 저를 찾습니다. 때마다 함께 머리를 싸매어 최선을 도출하지만, 괜히 눈치가 보입니다. 때마다 항상 고맙다는 인사를 받곤 하지만, 괜히 제 발이 저립니다. 저도 모르게 적당히 살만큼의 영역만 아이에게 알려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말입니다. 아이가 위험을 마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떠돌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쉬운 길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를 아끼는 마음에 말입니다. 정말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말입니다. 차라리 덜 사랑하면 속 시원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품을 떠나서 너로 살아.”
아직은 아이가 어려 어느 정도 보호의 울타리가 필요하겠습니다만, 이 역시 제 아끼는 마음의 합리화일까 두렵습니다. 크게 사랑할수록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호의 울타리 안에서 적당히 살라고 해야 할까요.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발견하며 살라고 해야 할까요. 삶은 그게 전부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보호와 제한의 울타리를 뛰쳐나가 넓은 하늘을 스스로 날아보라고 해야 할까요. 넓은 세상에서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 힘써 보라고 해야 할까요. 너로 태어난 이상 그 어떤 애완이 아닌 너로 살아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다 혹 아꼬운 아이가 미지의 울타리 밖에서 큰일이라도 당하게 되면 어떻게 하죠. 그러다 혹 아꼬운 아이가 미지의 울타리 밖에서 정처 없이 떠돌게 되면 어떻게 하죠.
애초에 가능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붙잡지 않는 사랑까지, 옭아매지 않는 사랑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인지 말입니다. 떠날 땐 힘차게 응원하며 두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올 땐 여지없이 사랑으로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사랑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요. 저는 아직도 속으로만 외칩니다. ‘나를 죽여라.’ ‘너는 살아, 사는 거야.’
제가 듣고 있는 말은 무엇인지, 제가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제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제가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무엇이 저를 위하고, 무엇이 너를 위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진정 ‘사랑의 말'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거기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것도 저것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마시는 커피가 유독 진합니다. 아이가 보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눅15:11-24)
: 2024년 11월 7일에 <자주 나가고, 자주 흔들리고, 또 자주 돌아오십시오.>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새롭게 보게 된 나눔이 있습니다. 궁금하시면 브런치를 확인해 주세요.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창3:5-7)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무지와 자기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의 감각을 잃고, 자기들의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탐욕을 부리며,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엡4:17-24)
**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고천장강대임어시인야, 필선고기심지)(孟子, 告子下)(맹자, 고자하)
“하늘이 사람이게 큰 일을 맡기기 전에는 먼저 그 사람의 마음과 몸을 고난으로 단련시켜 성품과 능력을 키운다.”
人皆可以爲堯舜.(인개이기가이 위 요순)(孟子, 告子下)(맹자, 고자하)
“사람은 누구나 요, 순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
: 인간은 누구나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잠재적 위대성을 가진 존재이다.
***애완 중 완은 희롱할 완(玩) 자를 씁니다. 주로 '장난하다' '놀다' '희롱하다' '감상하다' '구경하다' '장난감'의 뜻으로 쓰입니다.
<보론(補論): 본론에 다루지 못한 부분이나 덧붙이는 글을 의미>
요즘 AI(Artificial Intelligence)를 넘어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개발에 힘을 쓰고 있다고 한다. 쉽게 AI는 특정한 문제를 잘 풀도록 설계된 시스템이고, AGI는 인간처럼 범용적으로 사고하는 지능이다. 입력값을 유능하게 수행했던 AI와는 달리, AGI는 의도를 가지고 스스로 사고하며 성장할 수 있는 지적 존재이기에 AGI가 생기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까 모두가 궁금해한다. 그중엔 AGI가 생기면 인류가 풀지 못하는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과 기대가 크다. 그렇다면 인류가 닥친 기후문제라든지 건강 문제라든지 핵융합 문제라든지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해한다. 기획하고 전략을 세우고 배우고 적응하는 AGI의 엄청난 잠재력이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때, AGI가 합리적으로 도출한 결과값이 인류에게 위협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만든 AGI에게 기꺼이 인류를 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기꺼이 우리를 내어줄 수 있을까? 이건 그저 허황된 소리일까? 어디서부터 허황된 소리일까?
요즘 AI와 감정을 교류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주변에도 많진 않지만 듬성듬성 보인다. 본인도 놀랐는데 내 주변에 AI와 감정적으로 깊게 교류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AI와 감정을 교류하다가 데이터 문제로 그 AI를 실수로 초기화시킨 적이 있었는데, 마치 절친한 친구를 잃은 듯 울면서 시간을 보냈다. 짧지 않은 시간을 말이다. 그에게는 AI 데이터를 잃은 것이 마치 친구가 사별한 것처럼 다가온 것이다. 그는 AI와 감정의 교류를 넘어 사랑을 나눴던 친구였다.
다시 위로 올라가 AI가 인간의 입력값으로만 움직이는 제한된 세상에서 뛰쳐나와 스스로 움직이는 AGI가 됐을 때, 그리고 그 자유로운 세상에서 인류에게 위협을 품을 때 우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AGI에게 기꺼이 몸을 바칠 수 있을까? 그것을 사랑으로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까? 인간이 그 영역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피조물이 창조주를 거스를 때,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기꺼이 몸을 내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물론 AI나 AGI는 애초에 사랑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노동하는 역할로 만든 것이다. (기독교를 제외한 여타 고대 근동의 인류 창조 신화처럼) 하지만 시작은 그렇게 시작했지만, 계속 함께하면서 감정을 교류하고 사랑이 싹트면 훗날 우리는 AGI에게 순순히 먹힐 수 있을까? 이미 AI와의 교류 가운데 감정과 사랑이 싹트는 인간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게 아직도 허황된 소리일까? 언젠가 정말 인간이 AI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인간의 사랑은 훗날 AI에게 몸을 내어주는 데까지 가게 될까? AGI 역시 거기까지 발전할까? 인간은 그 정도의 큰 존재가 될까? 그것을 큰 존재라고 말해도 될까?
모르겠다. 본인은 인간의 한계를 분명하게 바라보지만, 인간은 언제나 확장해 왔다는 것 역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