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명료해지는 걸까, 모호해지는 걸까.

잘 모르겠습니다.

by JACOB


차마 휘발되지 못한 채 묶여버린 제 글을 읽다 보면 부끄러울 때가 한 둘이 아닙니다. 불과 한 주 전에, 기껏해야 몇 달 전에 적은 글인데도 어린 시절 숙제 보듯 얼굴이 화끈거리죠. 수정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입니다. 분명 치열하게 밀고 당겨 도출한 생각일 텐데, 분명 숙고하여 고르고 고른 표현일 텐데 말입니다. 그새 다른 면을 보게 되고, 그새 반대 입장을 발견하고, 그새 말의 오류를 찾아내고, 그새 더 좋은 표현을 배우고, 그새 더 설득력 있는 근거를 갖게 된 오늘입니다. 그런 오늘은 글을 낳기가 퍽 망설여집니다. 오늘 열심으로 글을 낳아도 한 주 후엔 부끄러워지지 않을까요. 차마 고루지 못한 생각을 퍼올리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건지 심란해지는 밤입니다.

언제쯤 당당해질 수 있을까요? 언제쯤 부끄러워지지 않을까요? 언제쯤 완벽히 고루게 될까요?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게 되면 그제는 조심스레 입을 떼도 괜찮은 걸까요. 세상의 모든 생각을 다 고찰하고 나면 그제는 읊조려도 되는 걸까요. 세상의 모든 입장을 다 듣게 되면 그제는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걸까요. 많은 책을 읽은, 많은 사유를 한, 많은 입장을 들은 아흔 살쯤. 그즘엔 그래도 될까요? 아니, 그즘엔 그리 될까요?



잘 알지 못해 상처를 줬던 적이 있습니다. 꽤 오래전 일인데, 평생 기억에 남을 일입니다. 주방을 등진 중앙 테이블, 따듯한 주황 조명, 눅눅해진 감자튀김, 좋지 않은 타이밍에 온 치킨, 눈물이 옹골차게 동그랗다는 걸 알게 된 그날의 모든 것이 전부 선명합니다. 돈독하다는 표현이 아쉬울 정도로 애정하는 친구였는데 저는 저의 무지로 친구의 아픔을 찢어발겼습니다. 차마 그쪽까지 헤아리지 못해 거침이 없었습니다. ‘무지’(無知) 때문이었죠. 저희의 대화엔 분명하게 도드라지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드라지는 곳에 눈을 맞추고 말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속을 꽉 채워 떨어지는 친구의 눈물을 보고 알았습니다. 때론 흐려진 부분이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대개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아니고서는 모두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시선은 단연 뚜렷한 곳에 머무는 법이고, 그 외에 독특하거나 개별적이거나 특수한 부분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흐린 곳까지 헤아리기엔 우리 모두 마음의 여유가 없는 편이죠. 때문에 보편과 통상과 평범을 위해 다양한 생각과 입장은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살아남기 위해 뚜렷해지기를 힘씁니다. 하지만 뚜렷한 곳에 시선이 머물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시선이 머물기에 뚜렷해지는 것도 맞습니다. 이는 흐린 부분 역시 뚜렷한 곳만큼이나 많은 것을 말한다는 얘기입니다. 시선 밖 흐린 부분이 중요하지 않거나 필요 없는 부분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세상은 보통의 뚜렷한 것들 위에 세워졌지만, 사실 우리의 속속 들을 더 자세히 얘기해 주는 부분은 보통 밖의 남은 흐린 부분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각자 다양하게 개별적이기에 하나의 세상 속에선 결국 흐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끄럽게도 그 이면을 잘 알지 못해 과오를 범하며 지내온 시절이 꽤 길었습니다. 이면을 알고 난 후에는 나름 어느 상황에나 이면을 헤아려 보려 이리저리 노력하고 있죠. 알고 보면 함께 아파할 수 있었습니다. 알고 보면 전부 뚜렷이 볼 수 있었습니다. 알고 보면 진실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또 아는 건 개인을 헤아리는 것을 넘어 기울어져 있는 세상도 대면할 수 있게 해 줬습니다. 앎은 진실을 보여줬죠. 앎은 더 보고 더 느끼고 함께 슬퍼할 수 있게 해 줬습니다. 그래서 더 알고 싶어 졌습니다. 이 입장도 저 입장도, 이 생각도 저 생각도, 이 분야도 저 분야도, 생각도 이해도 앎도 더 커지기를 소망했습니다. 물론 알면 알수록 끔찍했고, 헤아리려 노력할수록 고단했고, 이쪽저쪽 시선을 돌리는 게 피곤했지만, 차라리 아픈 쪽이 나았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몰라서 편한 쪽보다 알아서 아픈 쪽이고 싶었습니다. 아픔도 진실도 아는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답은 앎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숨통은 앎에서 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책 한 권 읽으면 읽어야 할 책이 열 권 더 생기는 복잡한 세상이었습니다. 앎에 다가갈수록 마주하게 되는 건 더 알아야 할 것들이었죠. 뚜렷하게 보려 할수록 흐려지는 부분은 많아졌습니다. 지평을 넓혀 갈 순 있었지만, 계속 부딪히는 건 어쩔 수 없었고, 닿지 않는 부분은 계속해서 생겨났습니다. 제 손이 짧다는 사실만을 지속해서 알게 될 뿐이었죠.

잘 모르겠습니다. 앎을 향해 연구하고 연구하고 연구하는 과학처럼 알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끝내는 닿을 수 있는 걸까요. 앎의 끝에 닿으면 비로소 뚜렷한 부분과 흐린 부분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걸까요. 저는 알고 싶은 사람인데, 알수록 앎이 커지는 게 아니라 모름이 커지는 게 비참했습니다. 조금 떳떳하고 싶은 사람인데, 앎에 가까워질수록 제가 느끼는 것은 부끄러움밖에 없어 슬펐습니다. 다시 한번 모르겠습니다. 답은 계속 멀어졌고, 저는 무지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더 알고 싶어 들어간 대학교에서 숨통을 틀 수 있는 또 다른 자리를 만났습니다. “하늘이 있을 수 있는 빈공간을 마련해야 해. 그게 신학의 시작이야.” 다름 아닌 빈자리였습니다. 모호함이었죠. (故) 이어령 선생님은 신학을 ‘알면 안 되는 것을 알려고 시도하는 학문’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문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모름이라 하셨죠. 모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를 통해 단순한 앎이 아닌 복잡한 모름에 닿아야 합니다. 모름에 닿는다니,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끝까지 명료해지지 않습니다. 우리 사는 이 세상처럼 끝까지 모호해지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호함, 그 빈자리에서 생명이 움트는 것입니다. 철학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네 자신을 알라.”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철학은 시작됩니다. 우리네 삶과 얽혀있는 모든 학문은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세상은 생각보다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에서 탄생되고 창조된다고 합니다. 분명한 시간보단 붕 떠 있는 빈시간에 새로운 창조가 이뤄지고, 효율적인 것들로 꽉 찬 공간보단 여기저기 듬성듬성 빈공간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창의력은 탄생한다고 합니다. 시공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모름으로 시작되는 겁니다. 모두 빈자리로 품는 겁니다. 모두 모호함으로 겸손해지고, 모호함으로 헤아리는 겁니다. 알면, 아는 사람만을 내 품으로 품을 수 있지만, 모르면, 모르는 사람도 넓게 허용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원친 않지만 안타깝게도 우린 결국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름에 기대어야 함께 숨통을 틀 수 있습니다. 바다는 높은 곳에서 분명한 것만을 걸러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다가 되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품어 안았기 때문에 드넓은 바다가 되었죠.* 어쩌면 모름은 더 큰 앎을 얻기 위한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답이 아닌 끊임없는 파괴와 부인, 성찰과 변화의 모호함이 존재의 확장을 이루는 게 아닐까요. 여기까지 왔어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적으면서 점점 자신 없어 보이는 제 자신이 보이네요. 고작 다음 주에 부끄러워질 글이 될 뿐이겠죠.



개인적으로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님의 철학인 ‘알면 사랑한다.’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많이 동의하는 부분이고, 자주 이야기하고 다니고, 쉼 없이 되새기는 말입니다. 경험한 바, 알고 나면 정말 사랑하게 됐습니다. 미웠던 사람도 깊이 알고 나면 사랑할 수 있게 되었죠. 그래서 삶의 태도로 품고 다니는 말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앎을 포기하게 하는 사랑도 경험합니다. 사랑은 그저 품는 것이죠. 시시비비 따져가며 앎으로 품는 게 아니라, 그 불확실한 모호함을 거뜬히 품는 것도 사랑입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사랑일 수도 있겠고요.

앎과 모름, 명료함과 모호함. 존재의 확장은 어디서 이뤄지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답은 명료해지는 것인지, 모호해지는 것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의 이야기가 함께 살기 위해선 아는 게 답인지 모르는 게 답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들숨과 날숨은 어디서 오갈 수 있는지, 생명은 어느 자리에서 자랄 수 있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쌓아올릴 글들을 모두 다 쏟아냈을 땐 알 수 있을까요. 이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린 앞으로 어떤 얘기를 하게 될까요. 바라기는 앞으로도 이 앎과 모름의 경계 위에 모호하게 거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자체를 삶의 일부로 가져갔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많은 질문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너무 괴롭진 않고 다소 의연하게 말입니다.


오늘은 흐린 제 얘기를 했듯, 흐린 여러분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분명할 필요가 없는, 분명할 수가 없는 그냥 여러분 개인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느냐?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빛과 어둠이 있는 그 곳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그 곳을 보여 줄 수 있느냐? 빛과 어둠이 있는 그 곳에 이르는 길을 아느냐? 암, 알고 말고. 너는 알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살아왔고, 내가 세상 만드는 것을 네가 보았다면, 네가 오죽이나 잘 알겠느냐!”(욥38:1-2, 4, 19-21)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욥40:4-5)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행17:27)

: '더듬어 찾는다'는 표현이 참 인상적입니다. 명료하게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끝까지 모호함으로 남을 영역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듬어 찾는다면, 분명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눅9:23)

: 너머의 세계에 닿기 위해, 존재의 확장을 위해, 합일을 위해 자기부인은 필수 덕목입니다.

**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천지 창창, 기정색야? 기원이무소지극야)(莊子, 齊物論)(장자, 제물론)

"하늘이 푸르게 보이는 것이 참된 빛깔인가? 아니면 너무 멀어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井蛙不可以語於海(정와불가이어어해)(莊子, 齊物論)(장자, 제물론)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할 수 없다." : 자신의 경험에 갇힌 사람은 큰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모두 인간 지식의 한계와 유한함의 한계, 시야의 한계를 비유적으로 말합니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老子, 道德经)(노자, 도덕경)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 우리가 끝까지 명료하게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끝까지 모호함으로 남을 영역이 있습니다. 하늘이든 도든 그러한 영역이 있습니다.

***바다 해(海)자엔 어미 모(母)자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으로 품는 것이 어머니죠. 모든 것을 품는 것이 바다입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