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의 시간: 나는 무슨 시가 될까?
신년부터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생활 범위인 청주와 서울을 넘어 가평도 제주도 목포도 다녀왔죠. 각기 다른 사람들과 각기 다른 목적의 모임이었는데, 어디서나 꾸준히 오가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 거예요?” 청춘을 운운하던 가평에서도, 인간을 토의하던 제주에서도, 서로를 공유하던 목포에서도 우리는 물었습니다. 소리 내어 묻지 않아도 계속 물었습니다. 진득해진 입을 열어 물었습니다. 끈적해진 마음을 열어 물었습니다. 질겨진 머리를 열어 물었습니다. “어떻게 살 거예요?”
여간 피곤하고 귀찮은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주 괴롭기도 하고 자주 외롭기도 합니다. 질문 안에 ‘어떻게’라는 단어가 있어 퍽 오해하기 쉽지만, 이는 ‘어떻게’보다 ‘왜’의 영역에 가까운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생각해 봤건대, 과학과 수학은 ‘어떻게’를 주로 말합니다. 과학은 우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잘 알려주지만, 우리를 왜로 설명하긴 퍽 어렵습니다. 과학은 1+1=2라는 옳은 답이 있습니다. 하나의 상태를 말하는 원자엔 꼭 정해진 전자만이 들어서야 하죠. 정이랍시고 이상한 전자 하나를 더 끌어들일 수 없고, 자비랍시고 괜히 다른 전자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틀린 값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은 분명하고 정확하고 차가운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과 수학에는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살아 있음이 없어야 합니다. 살아 있음을 죽여야 합니다. 인간이 없어도 과학과 수학은 움직이고, 오히려 살아 있는 인간이 없어야 과학과 수학은 편합니다.
반면에 철학과 신학은 ‘왜’를 주로 말합니다. ‘왜’는 과학과 다르게 모호하고 불분명하고 따뜻한 속성을 가집니다. 인간만이 묻는 것이기에 인간과 떨어질 수 없고, 살아 있기에 불규칙적이죠. 나와 네가 만나면 셋이 되기도 하고, 2인실의 방엔 3명도 4명도 끼여 들어갈 수 있습니다. 2인실에 침대가 2개라고 꼭 2명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바닥에라도 재워준다면 3명도 4명도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과학과 수학의 계산과는 다릅니다. 고로 살아 있는 인간의 ‘왜’에 차갑고 명확한 정답은 없습니다.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을 뿐, 모두의 정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왜 앞엔 각자의 무궁무진한 이야기만 있는 겁니다. 인간적 ‘왜’의 영역엔 관념화도 일반화도 획일화도 없습니다. 없어야 합니다. 일반화하고 획일화하고 관념화하는 순간, 인간도 삶도 생명도 사랑도 분명해졌다는 명목 하에 모두 죽습니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개구리를 해부하여 아는 순간 개구리는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물론 때로는 자신의 분야가 아니기에 다른 분야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때로’ 일뿐입니다. 주 분야가 아니면 당연히 오류가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를 이야기하는 철학과 신학에게 ‘어떻게’를 물었던 과거는 수많은 시대착오적 길을 제시했습니다. 모든 사회욕망과 자연현상을 신의 계시나 신의 현현으로 해석했죠. 그로 인해 인류사는 많은 오류를 범했고,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지금도 그리 많이 변하진 않았다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 하지만 지금 그보다 더 크게 보이는 건 과거와 정반대로 작용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오래 탐구해야 하는 ‘왜’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왜’를 이야기하는 철학과 신학에게 ‘어떻게’를 물었던 과거처럼, 오늘 우리는 ‘어떻게’를 이야기하는 과학과 수학에게 이 ‘왜’의 질문을 묻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르고, 모두가 불규칙적이고, 모두가 변덕스럽고, 모두가 예측 불가능한, 오히려 같은 거 하나 찾기가 어려운 개인의 ‘왜’를 하나의 정답으로 통섭하는 과학과 수학에게 묻고 있습니다. 과학은 살아 있는 것을 오히려 죽여야만 하는데 말입니다. 수학은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오늘날 너도나도 생에는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한두 번 들리는 거라면 제법 위로가 되겠지만, 너무 공공연히 들려옵니다. 길가의 꽃 하나에도 갖은 미사여구 의미를 부여하면서 정작 자신의 생에는 의미가 없다고 치부합니다. 모순적인 말을 그럴듯하게 풀어 얘기합니다. 저는 궁금합니다. 그렇게 이곳저곳에서 떠드는 생의 무의미성은 정말 그들이 오랜 시간 깊이 생각하고 탐구해서 내놓은 결론일까요? 혹 그렇다면 더 붙일 말이 없겠습니다만, 대개는 아마 생각하기 귀찮아서 뱉는 말일 겁니다. 생각하기 어려워서 쏟는 말일 겁니다. 생각하기 괴로워서 싸는 말일 겁니다. 이는 과거에도 그랬습니다. 과학이 이리 발전하지 않았을 적, 자연현상을 과학으로 밝혀내는 것은 외롭고 괴롭고 귀찮고 어려웠습니다. 마땅한 기구도 없을뿐더러 당시 신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위험을 수반해야 했죠. 그래서 모두가 생각하기를 그치고 모든 자연현상을 신의 현현으로 돌렸습니다. 그게 편했습니다. 그게 맞았습니다. 오랜 시간 그래 왔습니다. 생각하는 건 어렵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건 귀찮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건 위험하고 괴롭고 외롭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정반대로 같은 현상이 일고 있습니다. 빠르고 깔끔하고 분명하고 명료한 과학이 만연한 오늘, 과학이 제시하는 답으로 모든 것을 결론 내는 게 편해졌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오래 탐구해야 하는 ‘개개인의 왜’ 역시 명료하고 빠르게 말해주는 과학에게 맡깁니다. 성찰함으로 발견해야 하는 영역까지 과학에게 맡깁니다. 인간과 개인의 영역도 맡긴 겁니다. 이전과 다를 건 없습니다. 이전에도 오늘에도 우리는 그저 생각하기를 귀찮아할 뿐입니다. 앞서 얘기했듯 ‘왜’의 영역은 언제나 피곤하고 귀찮고 괴롭고 외로운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고통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 무의미성입니다.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의식, 밖으로 던져졌다는 의식, 내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의식입니다. 물론 장 폴 사르트는 인간을 세상에 내팽개쳐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과학도 먼지 같은 우리 존재에 무엇을 덧붙이지 않죠. 하지만 반대로 헤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알을 깨고 나와 자신만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계속 발견하라 말하고, 데카르트는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되어 일생 자신이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탐구하라 말합니다. 생명(生命)의 명(命) 자가 ‘명령을 받는다’는 뜻인 거 알고 계셨습니까? 생(生)이 있는 자는 다 명(命)이 있는 것입니다. 아마 모두가 각기 다른 명을 가지고 있겠죠. 생명(生命)은 그 명을 살라는 말입니다. 또 성경은 말할 것도 없이 경계에 있는 자들에게 떠나라고, 신을 벗으라고, 미세한 소리를 들으라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너머를 바라보라고, 깊은 곳으로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만의 천명(天命) 듣고 다시 태어나라’고 촉구합니다.
이처럼 다양하고 많은 목소리가 떠도는 넓은 세상 속 여러분은 어디로 가실 겁니까?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어디로 가실 겁니까? 쉬워 보이는 길도 있고, 지난해 보이는 길도 있습니다. 물론 어디로 가져갈지도 자유이긴 합니다. 자신만의 답이기도 하겠죠.
특정한 목적이 있든, 보편의 목적이 있든, 자유롭게 사는 것이든, 사명을 갖는 것이든, 그저 존재하는 것이든, 어찌하든,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숭고한 일입니다. 애초에 ‘왜’라는 질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자신만의 답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자신만의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모두의 정답’이 될 수 있진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혹 세상과 자신과 존재와 삶에서 ‘왜’라는 질문에 부딪혔다면, 축하드립니다. 숭고한 존재가 되기에 앞서 고치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부디 생각하기를 않게 하는 권태와 나태를 물리치기를 바랍니다. 애벌레는 고치의 긴 시간을 견뎌내야 하늘을 갖는 나비가 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선생님 키팅은 어린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요? 교과서를 찢으라고? 책상에 올라서라고? 여기저기 걸어보라고? 스포일러가 될까 말을 아끼겠습니다. 다만 저 들으라고 대사 하나 읊조려 봅니다.
“장엄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도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는 것.”*
“너는 무슨 시가 될까?”
“어떻게 살 거예요?”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까요, 세상에 내려온 존재일까요.
의미와 무의미, 숭고한 시간을 견디는 우리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눅4:1-2, 13-14)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눅5:4-6, 9-11)
: “깊은 곳으로 나가라.” 경계를 넘은 심연에서 그들은 새로운 세계와 자신의 최선을 발견했다. 그들이 잡은 엄청난 양의 물고기에 놀란 그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났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요3:3-6)
**佛在自性中, 不向外求 (불재자성중, 불향외구)(六祖壇經)(선불교, 육조단경)
“부처는 자기 본성 안에 있으니, 밖에서 구하지 말라.”
: 깨달음의 근원은 외부에 있지 않고 결정적인 전환은 자기 성찰의 순간에 일어난다고 해석할 수 있다.
自燈明 法燈明 (자등명 법등명)(大般涅槃經)(불경, 대반열반경)
“스스로 등불을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 외부의 기준이 너무 많은 시대에 남의 등불을 빌려 걷지 말고 자기 안에서 등불을 켜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내로남불이겠습니다. 저 역시 제 전공이 아닌 곳에 여러 말을 싸지르니 말입니다. 분명 오류가 많을 겁니다. 다만 겸손하면서도 용기 있고 싶습니다.
****윌트 휘트먼(Walter Whitman)의 <오, 나여! 오, 삶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