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사람, 향유하는 사람

질문은 왜를 ‘묻’고, 아름다움은 왜를 ‘묻는’다.

by JACOB


순례길 광경이 맞나 싶은 긴 줄이 뻗어 있습니다. 설레는 표정, 들뜬 대화, 멈춘 걸음. 왜 땡볕에 줄을 서 있나 보았더니 누군가 특별한 쎄요(Sello, 순례자 여권에 찍는 도장)를 찍어주고 있더군요. 실링 왁스로 도장을 찍어주는데, 문양의 모양과 색상을 순례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는 이걸로 찍을 거네 누구는 저걸로 찍을 거네, 누구는 이게 이쁘네 누구는 저게 이쁘네, 누구는 만드는 방법이 신기하네 누구는 도장의 문양이 신기하네 등 지나가는 순례자 대부분이 들뜬 마음으로 줄을 이었습니다. 저는 만드는 과정을 살짝 지켜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 순례 증서를 위한 필수 도장도 아니었으니까요. 얼마쯤 길을 걷다 뒤를 보니 줄은 이전보다 더 길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제게 물었습니다. ‘나는 무엇에 줄을 서는 사람일까.’


저는 먹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끼는 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 주변엔 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죠. 저는 살기 위해 먹는 편이라 말하고, 그들은 먹기 위해 산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항상 맛집에 갑니다. 옆 동네에 분명 같은 메뉴가 있는데도 돈과 시간과 노력을 배로 들여 맛집에 갑니다. 30분이고 1시간이고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저는 참다 참다 입을 열죠. “배만 채우면 되는 거 아냐?” “저 건너편 순댓국 먹어도 아무 문제없어.” “이 순댓국이랑 저 순댓국이 뭐 그리 다른데? 저 순댓국도 영양분 다 들어있을 거구만.” 아, 혹시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친한 친구에게만 뱉는 허물없는 말입니다. 아무튼 저는 맛집에 줄을 서지 않습니다. 특별한 도장에도 줄을 서지 않습니다. 그에 들이는 시간도 돈도 노력도 아깝다고 느끼는 편입니다. 꼭 그 순댓국을 먹지 않아도, 꼭 그 도장을 받지 않아도 제 삶에, 제 하루에, 제 한 끼에, 제 몸에, 제 순례길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는 무엇에 줄을 서는 사람이냐.” 그런 제게도 줄을 서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제게도 시간과 돈과 노력을 배로 들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게도 걸음을 자꾸 멈추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왜’입니다. 생각과 의심과 이해를 위한 질문, ‘왜’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지, 나는 왜 네가 아니라 나인지, 나는 어떤 존재이며 삶과 죽음은 무엇인지, 세상은 어떻게 얽혀 나타나는지, 정의는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지, 세상은 선으로 흘러가는지 악으로 흘러가는지 등 저는 수많은 질문 앞에 줄을 섭니다. 기원 원리 진리 본질 의미 존재 현상 질서 등 저는 세상과 생에 대한 이해 앞에 자주 발걸음을 멈춥니다.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시간을 들이고 돈을 들이고 노력을 들여 묻습니다. “왜?”


“왜요?” 본격적으로 왜를 남발하기 시작하는 아이 때부터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가르친 적이 없어도 아이들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투쟁합니다. 이는 자연적으로 생각이 인간이라는 존재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생각은 인간만이 지닌 유산이기도 하죠.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르네 데카르트 역시 회의와 추론을 인간 실존과 연관시켰습니다. 물론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 속 ‘의심’이 이성적 사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이라고 쓰인 데는 그만큼 이성적 사고와 생각, 회의와 추론이 인간됨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을 뺀 과학과 수학은 ‘어떻게’를 얘기합니다. 과학과 수학이 말하는 분야에선 사람됨을 살피기 쉽지 않습니다. 쉬이 내가 너를 해하지 않을 이유를 과학적으로는 찾기 어렵습니다. 과학과 수학은 ‘어떻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철학과 신학은 ‘어떻게’가 아닌 ‘왜’를 얘기합니다. ‘어떻게’의 영역을 철학과 신학 안에서 찾고자 한다면 분명 시대 속 수많은 오류가 발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철학과 신학에선 결코 인간을 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학과 신학은 애초에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왜라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상위이고 무엇이 더 유익하고 무엇을 더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됨은 ‘왜’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겁니다. ‘질문’에서 인간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생각하는 게 인간이고 생각하는 게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우리는 왜 아래서 오히려 인간됨을 잃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왜’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을 발견하고, ‘왜’라는 질문 위에 자신이 인간임을 말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그 인간됨을 실현하기가 가히 쉽지 않다는 겁니다. 아무리 왜를 찾고 생각하고 의심하고 물어도 세상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입니다. 저의 ‘왜’ 역시 정답을 알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단 그저 알 수 없음에 대한 절규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돈을 쓰고, 시간을 들이고, 정성과 노력을 들여도 답을 찾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피곤하기만 할 때가 많습니다. 생이 지쳐가기만 할 때가 많습니다. 생이 남루해지기만 할 때가 많습니다. 꼭 왜가 필요할까요. 생에 왜가 꼭 필요할까요. 인간됨에 있어 왜가 꼭 필요한 걸까요. 왜를 묻지 않는다 하여 인간됨을 포기해야 할까요. 인간이기 위한 조건이 너무 가혹하다고, 결국 알 수 없는 세상 앞에 외치는 왜는 사실 부조리하기 밖에 더하냐고 말할 순 없는 걸까요.



변변찮은 포토에세이 작업을 맡게 되면서 셔터가 가볍게 눌리지 않습니다. 카메라를 눈까지 들어 올리고 나서도 생각이 많습니다. ‘이걸 왜 찍으려고 하는 거지?’ ‘이 사진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뭐지?’ ‘이 사진이 충분히 설득력 있을까?’ ‘요즘 필름값이 장난 아닌데’ 신중한 태도야 필름카메라를 쓰기 위해 더없이 좋은 덕목이지만, 오래도록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눈 위를 오르내리락 하기만 하는 카메라가 안쓰러운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왜?” 결국 ‘왜’ 앞에서 셔터는 제 발걸음처럼 더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있습니다. 괜히 사진도 피곤하고 고단해집니다.


“찰칵” “찰칵” 그러다가도 저 모르게 셔터를 마구 누를 때가 있습니다. 황홀하게 타오르는 일출을 볼 때, 금발을 타고 내려오는 빛의 산란을 마주할 때, 할아버지 손 꼭 잡은 손녀의 앙증에 마음이 홀릴 때, 어릿어릿한 아이들의 맑은 웃음이 스며들어올 때, 서로에게 몰두하는 그들만의 색감에 반응할 때 등등. 사실 모두 충분히 기록한 장면인데도 왜인지 이때는 셔터가 후합니다. 때에는 굳이 왜를 묻지 않습니다. 스스로 이유를 캐지도 않고, 필름 값을 따지지도 않습니다. 메시지와 호소력을 차치하고 제 귀에 들리는 소리는 그저 하나입니다. “찰칵” ‘아름다워요.’ 질문 없이 그저 셔터가 움직이는 순간입니다. “찰칵” 그리고 작가에게 셔터 소리의 뜻은 하나지요. “아름다워요.” “당신, 아름다워요.”


아름다움을 느낄 때 우리는 왜를 묻지 않습니다. 아름다움 아래에는 왜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왜를 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특히 삶이 고단하고 외롭고 깊어질 때 우리는 왜를 묻곤 합니다. ‘생이란 무엇이지’ ‘나 잘 걷고 있는 걸까’ 하지만 삶이 행복하고 고양될 땐 ‘이게 인생이지’ ‘이런 게 인생이면 살만 하지’하며 왜를 묻어버립니다. 사랑할 때, 사랑하는 것과 함께 할 때, 그저 명랑함과 경쾌함으로 친구와 실없이 우정을 나눌 때 등 다양한 아름다움에 젖을 땐 인간됨의 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됨의 왜를 묻지 않습니다. 아니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아름다움 역시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인간을 지탱하는,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반대 끝 편의 다른 인간됨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름다움 역시 의미를 읽거나 이성적 판단을 통한 작용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 학자들의 주장처럼 우리는 이성적 판단보다 그저 현상과 반응에 가까운 쪽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고 향유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향유할 때 우리는 왜를 수면 위로 올려 묻는 게 아니라, 왜를 수면 밑으로 묻어버립니다.



왜를 묻는 질문과 왜를 묻어버리는 아름다움이 모두 인간됨에 가깝다는 게 제법 흥미롭습니다. 양쪽의 끝에서 서로를 배격하는 개념인 줄 알았는데, 서로 상반된 개념인 줄 알았는데, 둘은 조화로울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인간됨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다니요. 생각하는 것과 향유하는 것 모두가 인간다움입니다. 우리는 때로 삶을 깊게 하는 ‘왜’를 물으면서, 또 때로는 삶을 고단하게 하는 ‘왜’를 묻으면서 인간됨을 실현하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과 생과 세상을 살아가는 겁니다. ‘묻다’라는 한 단어에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가 표현되는 것도 신기하지 않습니까? 질문은 왜를 묻고(끌어올리고), 아름다움은 왜를 묻습니다.(덮어버립니다.)

왜라는 질문과 아름다움 사이 우리는 어느 쪽에서 인간다움을 더 누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 역시 공소리입니다. 맛집 순댓국 안 먹어도 제 삶에 그 어떤 문제가 없듯이, 세상을 깊게 이해하려는 왜 없이도 인간됨과 삶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저 누군가 먹을 것에 진심인 것처럼 저는 삶에 대한 질문 앞에 항상 줄을 서는 사람일 뿐입니다. 한 끼 한 끼를 맛난 것들로 채우면 어느덧 하루하루가, 어느덧 일 년 일 년이, 어느덧 일생이 맛난 것들로 풍요로워지듯이, 저 역시 왜라는 질문을 하나하나 굳이굳이 어렵게어렵게 맛보다 보면 어느덧 제 삶도 깊어진 이해로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조심스레 소망해 봅니다. 뭐 너무 지친다 싶으면 왜를 묻어버리고 과감히 아름다움으로 도피해 버리죠. 그래도 되는 거니까요.


2026년이 시작됐습니다. 새해 인사가 많이 늦었고, 말이 너무 길었네요.

2026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마음껏 생각하고 마음껏 향유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老子, 道德经 58)(노자, 도덕경 제58장)

“화란 복이 기대어 있는 곳이고, 복이란 화가 숨어 있는 곳이다.”

: 노자는 화와 복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반된 것 같지만 이미 서로의 안에 함께 있다고 말한다. 바로 뒤에는 이런 말이 이어진다. 孰知其極?(숙지기극)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아름다움은 감각이 아니라 판단의 문제라고 말했지만, 반대로 이혜관계없이 누리기만 하는 즐거움이라고도 표현했다. 헤겔은 미학을 이야기하면서 아름다움의 영역을 인식과 경험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CS 루이스는 아름다움을 인간만이 감각할 수 있는 내면 깊은 곳의 결핍과 갈망이라고 말했다. 영적이자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한 학자.

****‘왜라는 질문’은 문자 텍스트와 같고, ‘아름다움’은 그 외에 라디오나 TV 같은 미디어와 같습니다. 둘 다 정보를 얻거나 감정에 젖을 수 있지만,(인간됨을 실현할 수 있지만) 방식과 깊이가 다릅니다. 문자 텍스트인 책은 소리도 없고 영상도 없어서 모든 것을 뇌에서 스스로 만들어 창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고되고 지루하죠. 하지만 그만큼 느낄 수 있는 감각의 밀도가 다릅니다. 반면에 라디오나 TV는 소리나 영상을 통해 비교적 쉽고 자극적이게 정보나 감정을 얻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문자 텍스트보다 밀도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방식도 다르고 깊이도 다르니 그저 다른 매체일 뿐, 무엇이 우위에 있고 무엇을 꼭 선호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 ‘책을 꼭 읽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유시민 작가님의 답변을 ‘왜를 꼭 물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으로 바꿔서 설명해 봤습니다. 유시민 작가님은 ‘책을 꼭 읽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꼭 책을 읽을 필요는 없지만,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다. 책은 소리도 시각도 없고 글자밖에 없다. 텍스트 한 가지만 가지고 모든 것을 뇌에서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서 다른 미디어보다 느낄 수 있는 밀도가 깊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지금 시대에 책이 필수일 필요는 없다. 정보를 얻거나 감정에 젖을 수 있는 미디어는 지금 너무 많기 때문이다.”

: 유대인들은 신의 의도나 생각을 찾아가는 과정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이 두루마리를 예언자에게 먹여줄 때, 곧 신의 의도나 생각을 알게 된 예언자는 그 두루마리가 꿀같이 달았다고 표현합니다. 피곤하고 고단한 것은 맞지만, 온전히 알 수 없는 영역인 것도 맞지만, 스스로 ‘왜’와 씨름하여 얻게 된 세상에 대한 이해와 발견은 다른 것과는 밀도가 다릅니다. 얼마나 왜 앞에 줄을 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몰라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 맛은 꿀같이 달죠. “사람아,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알려 주어라. …… 내가 그것을 먹었더니, 그것이 나의 입에 꿀같이 달았다.”(겔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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