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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일오 Mar 31. 2024

더불어 있음, ‘존재의 언어’

나 여기 있어


    재작년 가을, 무더운 더위가 서서히 꺾여갈 무렵에 저는 참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원인이 무엇인지 어떠한 상황인지 당시 제 감정이 어떠했는지 그 모든 걸 이 재주 없는 말솜씨와 글솜씨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삶의 끝을 향해 발을 내딛고 싶었던 순간이 제게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개인적인 이야기를 살짝 꺼내보려 합니다. 혹시라도 저를 아는 누군가 이 글을 볼까 마음이 좀 쓰이긴 하지만, 담담할 수 없었던 그날의 일을 최대한 담담하게, 참으로 무거웠던 그 시간을 과히 무겁지 않게,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계속 기억하기에 이제는 볼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구원(救援)을 당신과 함께 한번 나눠보고 싶습니다. 이 넓은 땅 어딘가 삶의 끝자락에서 위태롭게 홀로 서 있을 당신과 말입니다.


비극(悲劇), '누구도 알 수 없는 아픔'


    삶이 즐겁고, 즐겁기에 삶을 더 이어 살고 싶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역시나 ‘죽음’입니다. 삶에서 빛을 보고, 희망과 의미를 품고, 존엄한 가치 속에서 행복을 조금이라도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죽음은 피하고 싶은 게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겠죠. 허나 삶이 괴롭고, 괴롭기에 더는 삶을 이어 가고 싶지 않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다름 아닌 ‘삶’입니다. ‘전분세락’(轉糞世樂) 흔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처럼 살아있어야 희망도 품고 빛도 보고 행복도 느낄 수 있는 것이겠지만, 정말 모두에게 이 말을 적용할 순 없겠습니다. 세상에는 삶을 그저 두려운 시간 속의 허망한 어둠으로 느끼는 사람 역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살아가는 순간순간은 그저 번뇌(煩惱)와 고뇌(苦惱)의 시간일 뿐입니다. 삶의 모든 것이 번거롭고, 성가시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허망할 뿐이죠. 혹 그러한 삶의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까지 잃어버린다면 그들은 거침없이 삶의 끝으로 자신의 발을 내딛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죽음은 슬픔과 어둠이 아니라 삶의 번뇌와 고뇌가 사라지는 ‘안식처’(安息處)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느 토요일, 언제나처럼 저녁으로 햇반 컵밥을 먹고 성치 않은 다리로 어렵게 어렵게 옥탑방을 올라갔습니다. 슬슬 익숙해질 법한 목발 생활이었는데 그날은 선선한 날씨임에도 퍽 땀이 많이 나더군요. 힘겹게 올라온 옥탑방에 홀로 주저앉아 컵밥으로는 채우지 못했던 허기를 마저 채우기 위해 편의점에서 사 온 크림빵을 뜯었는데, 왜인지 그 어떤 기미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살면서 많이도 울어봤지만, 눈물이 쏟아진다는 게 무엇인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 뒤로 한참을 계속 쏟아낸 것 같습니다. 제 울음으로 옥탑방의 모든 공간을 다 매울 때까지 말입니다. 그때 저는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제 머리와 마음이 심히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죠. 제 마음은 계속 ‘아프다’를 연발했고, 제 몸을 이끌어 이 복잡한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안식처’로 저를 보내길 원했습니다. 반대로 제 머리는 ‘아프다’는 포화 속을 비집어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를 연신 외쳐댔죠. 쏟아지는 눈물과 입속에서 터져 새어 나오는 ‘끄억끄억’ 소리에 하늘을 붙잡아 기도할 순 없었고, 지금껏 그래왔듯 찬양이 기도가 될까 싶어 휴대폰 속에 있는 찬양을 틀었지만, 그 마저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어떤 아름다운 곡조와 감동스러운 가사도 제 마음을 위로하지 못했고, 저는 저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을 이전보다 더 큰 울음으로 토해낼 뿐이었습니다. 제 스스로 삶의 끝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이전에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또 울어도 하늘 아래서 울었던 제가 하늘의 위로를 받지 못하리라고도 감히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무도 모를 아픔은 정말 그 누구의 예상보다 더 컸나 봅니다. 그렇게 멈출 줄 모르는 눈물과 아픔에 등 떠 밀려 제 몸을 ‘안식처’로 던지고자 목발을 챙길 때, 그 갖은 포화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를 외쳐댔던 머리의 마지막 저항이었는지 저는 부스러기 같은 온기라도 붙잡고자 휴대폰 최근 통화 목록의 첫머리를 멀어져 가는 ‘생명의 옷술’ 잡듯 눌렀습니다.


고독한 개인과 부딪히는 언어


    참으로 안타까운 것 중 한 가지는 우리는 절대로 남을 체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모두 고독한 1인칭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겪고, 내가 보고, 내가 느끼는 것이 내 세상의 모든 것이죠. 물론 내 세상을 점차 넓혀갈 순 있겠지만, 내 세상을 넘어 네 세상으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넓힌 내 세상도 결국 내 세상일 뿐이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곧 아무리 내가 겪는 불행이 네가 지금 겪는 불행보다 더 커 보일지라도, 그것은 1인칭인 내가 보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기에 커 보일 뿐이지, 감히 서로의 것을 비교할 수도 판단할 수도 그에 대해 섣불리 말을 붙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것이 누군가가 겪고 있는 비극(悲劇)일 때에는 이 점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이런 고독한 1인칭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 만날 때 자주 겪게 되는 문제는 바로 각자의 ‘경험세계’가 다른 ‘언어의 충돌’입니다. 이는 누구는 영어를 쓰고 누구는 한국어를 쓰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함에도 서로의 경험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충돌하는 문제입니다. 너와 내가 같은 언어를 사용할지라도 결국은 각자 자신의 경험세계 안에서 이해된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자신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 간의 소통(疏通)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혹 상대 딴에는 노력과 배려와 걱정과 성의와 위로와 호의의 말이어도 말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각자 자신 밖에 살 수 없다는 안타까운 한계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언어적 충돌이겠지요.


 그날 저의 전화가 닿은 사람은 당시 한국에서 교제하던 친구였습니다. 그녀는 수화기 너머 속 저의 울음을 듣고는 일정이 있음에도 급히 자리를 비워 저와의 전화를 이어가주었죠. 어떠한 말없이 그저 끄억끄억 소리만 내뱉는 저를 심히 걱정하던 그녀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녀 나름의 노력과 배려와 걱정과 성의와 위로와 호의의 말을 끊임없이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느 하나 진심이 묻어 나오지 않은 말이 없었지만, 이전의 아름다운 곡조와 감동스러운 가사의 찬양이 제 아픔 하나를 위로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을 듣는 내내도 제 아픔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이 또한 언어의 충돌일까요, 쏟아지는 다른 언어 속 저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더욱 사무치게 느껴갈 뿐이었습니다.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고, 아픔은 줄을 새가 없었고, 어둠과 고독은 더욱더 깊어져 더 크게 허우적거리던 저는 끄억대는 소리를 잠시 억누르고 그녀에게 제 가장 간절한 딱 한마디를 뱉었습니다. “그냥, 들어줘…”


연대(連帶): 함께 책임지다.


    정적이 흘렀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 울음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오가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제가 울기만 했는지,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그녀가 제 울음을 듣기만 해 주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분명 짧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정말 저의 울음소리 외에는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습니다. 혼자 옥탑방을 가득 매울 정도로 오랜 시간 끄억끄억 울어댔던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싶겠지만, 분명 이전에 혼자 울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분명 저는 그 시간 동안 ‘혼자’ 울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수화기 너머로 같이 울어주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그 시간 동안 어떤 감동스러운 위로의 말을 꺼낼까 준비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죠. 오히려 더는 섣불리 위로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 더는 섣불리 해결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 자신의 세계와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제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 그저 저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제 곁에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어주려’ 하는 그 모습이 저에게 큰 ‘위로’(慰勞)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더불어 있음’,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오히려 무엇을 하지 않아 위로가 되었던 그 ‘존재의 언어’ 덕분에 저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절망’(絕望)을 기적처럼 서서히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절망’(絕望), 바라볼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선 위에서 내려오는 정의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희망도 썩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바라볼 것’ 하나 없는 상태가 아닙니까? 절망 안에서는 고개를 들어 무엇을 바라볼 힘조차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 앞에선 무엇을 가르쳐 주는 말도, 무엇을 가리켜 주는 말도, 잘잘못을 분별하고, 심지어는 무엇을 해결해 주는 말까지도 썩 힘이 되지 못합니다. 그럴 땐 그저 바닥에 박아버려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 고개 옆으로 ‘내가 당신과 함께 있다’는 ‘존재의 언어’가 필요할 뿐입니다. ‘더불어 있음’으로 보여주는 가볍지만, 그 자체를 안아줄 수 있는 거대한 언어이죠. 때로는 우산을 들어주는 능력의 힘보다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공감(共感)과 연대(連帶)의 힘이 더 강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무엇 하나 우러 볼 수 없는 절망의 상태에 놓인 생명에는 고개를 들어야만 느낄 수 있는 큰 것들보다 고개를 숙인 채로도 느낄 수 있는 ‘함께 있음’의 작은 온기가 기운을 더욱 북돋습니다. 이는 쏟아져 내리는 비를 함께 맞는 것, ‘compassion(com+pati): 함께 아파하는 사랑(慈悲)’이죠.


 이 ‘더불어 있음’이라는 ‘존재의 언어’는 사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다’는 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거창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실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말도 아닙니다. 또 실제 ‘언어’(言語)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는 다르게 그 어떤 ‘음성’조차 아닐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참 지나치기 쉽고, 느끼지 못할 때가 있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 ‘더불어 있음’의 ‘존재의 언어’는 고독한 1인칭의 인생만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가, 고독한 당신의 삶의 여정을 당신 홀로 걷게 하지 않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몸을 당신의 세계 옆으로 내던지는 ‘초월’(超越)의 언어입니다. 너 홀로 앓고, 너 홀로 고독히 걸어가야 하는 길을 제 선뜻 함께 걸어가겠다는 ‘구원’(救援)의 언어이죠. ‘함께 한다는 것’ 그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이 ‘구원救援: 생명을 건진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故)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대로 큰 슬픔이 극복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기쁨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그 ‘함께 있음’의 ‘작은 기쁨’은 우리 서로의 생명을 지탱하기에 너무나 충분하고, ‘작은 온기’가 되어 어느 누구의 생명을 건져내기에도 너무나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 ‘함께 있음’, ‘더불어 있음’으로 표현하는 ‘연대’(連帶)를 통해 나를 넘어 네게로 가는 ‘초월’(超越)을, 너와 함께 너의 삶을 책임지고 지탱하는 ‘구원’(救援)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반(基盤)으로 자리하고 있는 ‘생명’과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Immanuel)


거기 계십니까?


    저는 아직도 제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의 섭리(攝理)도, 제가 딛고 살아가는 땅의 질서(秩序)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저라는 존재도 잘 모르겠죠. 얼마 전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 지구 반대편엔 생명을 잃은 아픔의 새벽이 있었고, 이곳엔 생명을 환영하는 기쁨의 아침이 있었습니다. 어쩜 이리도 대조되는지, 저는 생명 탄생의 기쁨의 자리에 있었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분하고, 때로는 억울하고, 때로는 이해되지 않아도 이제는 그리 집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곳은 앞으로도 저희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영역(領域)일 테니 말입니다. 그저 제 손이 닿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함께 있음’의 연대(連帶)를 가능한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그게 지금 제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만약 기쁨의 잔치 속에서 당신 홀로 슬픔을 삭이고 있다면, 제가 당신과 ‘더불어 있음’으로 당신의 그 고독한 삶의 여정을 함께 책임지며 걸어가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저의 고독한 삶의 여정을 함께 책임지며 걸어가 주십시오. 그렇게 우리 ‘더불어 있음’으로 서로의 생명을 지탱하며 살아갑시다.


 당신이 누구며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제 짧은 손과 제 약한 몸이 당신께 닿지 않는 관계로 편지로나마 이 마음을 전합니다. 이 모습이 충분히 위선(僞善)으로 보일 수 있어 죄송한 마음입니다. 그저 편지로라도 당신을 위해 ‘진심’(眞心)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그 누가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고독한 당신의 삶을 함께 책임지며 걸어가 줄 ‘구원’(救援)이 당신 옆에 나타나주기를 말입니다. 또 반대로 연대(連帶)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편지를 씁니다. 홀로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 주십시오. 다른 것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옆에 있음’으로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렇게 연대(連帶)를 나타내 주십시오. 초월의 언어가, 구원의 언어가, 생명과 사랑의 언어가 우리 안에, 너와 나의 사이사이에 깃들 수 있도록.(Immanuel)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이 이 모든 재앙을 만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달래고 위로하려고 저마다 집을 떠나서 욥에게로 왔다.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 썼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욥2:11-13)


“내가 전능하신 분을 경외하든 말든, 내가 이러한 절망 속에서 허덕일 때야말로, 친구가 필요한데”(욥6: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2024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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