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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ob May 29. 2024

꼬깃꼬깃 구겨진 어린아이

어린아이는 다 그림을 그려


    캐나다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저도 여도 많이 변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며칠 전, 시차 적응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와 제가 나왔던 초등학교를 가 보았습니다. 재개발에 들어서 ‘철거’라는 글자가 험상궂게 그려져 있는 허름한 아파트를 시작으로 초등학교까지 걸어가는데, 낯을 느낄 만큼 참 많은 것이 변해있었습니다. 재개발에 들어선 아파트, 사라진 유치원, 거미줄 없는 담장, 포장된 도로, 막혀버린 샛길, 그리고 크게 달라진 저의 보폭(步幅). 보기에도 걷기에도 깔끔한 것이 참으로 편했지만, 걷는 내내 뭔가 모를 헛헛함이 제 가슴에 자리했습니다. ‘학교 가는 길이 이렇게까지 편하고 가까웠었나.’ 그러다 학교에 다다랐을 때쯤, 제 재학했을 적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은 한 문구점을 보았습니다. 허름해 볼품없지만 그 어떤 간판보다 튼튼해 보이는 ‘삼일문구’, 그리고 그 문구점 앞에서 변함없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놀고 있는 동네 아이들. 그제야 제 가슴에 온기가 차오르더군요. 아이들의 웃음이 제 가슴을 따뜻하게 채웁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온기와 함께 한숨도 가슴에 찹니다. 분명 따뜻한데, 살짝 씁쓸합니다.


우린 모두 되어가는 존재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면서 비상(飛上)합니다. 가정이라는 최초의 세계에 머무르다가 가족이 아닌 다른 낯선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세계와 접촉하고, 집이 아닌 다른 낯선 환경에 발을 디디며 새로운 세계와 마주합니다. 집으로 찾아온 부모님의 손님, 학교에서 함께 생활하는 학급 친구, 같은 목적을 위해 만난 공동체, 의도치 않게 모이게 된 집단 등 그렇게 다양한 만남과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하게 마주하게 된 새로운 세계를 통해 인간은 다른 세계에 대한 인식과 활기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날아오르기 시작하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그 과정 속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익숙한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아이에서 성인이 되는 과정 속에서, 자녀에서 부모가 되는 과정 속에서, 팔로워에서 리더가 되는 과정 속에서, 나에서 네가 되는 과정 속에서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를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자 하니 인간은 ‘생’(生)을 ‘명’(命) 받으면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며(開眼) 참 인간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가지는 숙명이라면 숙명, 여정이라면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새로움이 주는 낯설고 서툴고 불편한 것들을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때로는 자신의 흠에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자신의 운명을 탐구하고, 때로는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고, 수시로 자신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며 계속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인간은 그렇게 점점 더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겠습니다. 인간은 ‘되어가는 존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 인간이 되어갈 날개를 가지고서 끊임없이 날아오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먹여줄게, 그냥 있어


    글쎄요. 하지만 오늘날 인간으로 비상할 날개를 활짝 펴는 것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활기로 펼쳐지는 어린아이의 날갯짓을 가장 먼저 막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사회입니다. 용감하게 자신을 향해, 새로운 세계를 향해 크게 날아오르려는 어린아이에게 사회는 이야기하죠. ‘그냥 조용히 하고 따라가. 그래야 먹고살아.’ 사회는 적당히 날기만을 원합니다. 적당한 날개만을 피기 원합니다. 그나마 먹고살게 해 준다는 명목 하에 드넓은 하늘로 자유로이 비상하려는 어린아이의 날갯짓을 막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사회는 끝까지 우리를 담장 속에서만 날고 먹는 인간으로 길들입니다. 그리고 담장 안에서 어느덧 더 크게 날기를 잊어버린 우리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되죠. 자신의 세계와 자신의 운명과 자신의 길은 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진행되고 결정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은 교육을 이야기하는 학교에서도, 사랑과 신앙으로 모인 교회에서도, 화합과 지원의 가정에서도 누군가 굳이 말을 꺼내어 스스로 크게 비상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야기합니다. ‘아무 말 하지 마, 그래야 잘 풀려.’ 허나 어쩌면 담장 밖을 벗어나 하늘로 크게 날아오르는 삶이 불안한 살얼음판 여정일지라도, 삶이라는 것은 각자 저만의 것임이 자명한 사실이겠습니다. 어느 개인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삶을 살지, 땅을 디디는 삶을 살지는 적어도 누군가가 결정해 줄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함께할게, 높이 날아봐


    따뜻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을 보는데 왜 한숨이 절로 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핏 아이들의 모습에서 제 모습을 보게 된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제 모습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인지, 그때 느꼈던 옅은 쓴 맛은 지금까지도 제 혀끝에 찝찝하게 남아있습니다. ‘아이들이 그리는 어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그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날까’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자랐을까’ 오랜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복잡합니다. 감을 잃어서 그런 걸까요. 안 그래도 세찼던 세상의 역풍이 유독 견딜 수 없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후 집에 돌아와 짐을 마저 풀으며 캐나다에서 찍은 네 컷 사진들을 편지통에 넣으려다, 지금껏 차곡차곡 넣기만 했었던 편지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정성스레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진심 어린 편지부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의 쪽지 하나까지 읽어보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기도와 수고와 응원과 사랑과 환대에 의해서 저의 삶이 흘러왔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역시 제 인생이라고 해서 저 혼자 제 삶과 제 운명을 지고 제 길을 홀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큰 오산입니다. 앞서와는 다른 의미로 제 세계와 제 길과 제 운명엔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 앞에서 왈가왈부한 것이 아니라, 묵묵히 제 옆에서 저의 세계와 저의 길과 저의 운명을 다양하게 지원해 주었죠. 시기, 장소, 상태, 신분, 환경 등 제 어느 때에든 저 혼자 걷지는 않았었습니다.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의 말대로 사람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낯선 이들의 환대, 함께하는 연대, 지탱하는 응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숨죽인 기도로 사람은 살아갑니다. 물론 세차게 불어오는 세상의 역풍에 이 모든 것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겠지만, 돌이켜보아 이 세상에 ‘생’(生)을 ‘명’(命) 받으며 살아가기 시작한 시점부터 우리는 수많은 이들의 환대와 응원과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음을 수시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쉬이 보이지 않고 차마 느끼기 어려운 많은 이들의 사랑과 배려로 지금껏 살아가고 있음’을요.


 어디선가 보았던 문구인데 ‘흙에 불안을 더한 것이 인생’이라고 합디다. 불안은 인간의 삶에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말이겠지요. 앞서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며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자 여정인 것 같다고 말했는데, 어쩌면 이와 동일하게 불안 역시 인간의 또 다른 숙명이겠습니다. 하지만 이 불안한 삶의 여정에 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구원의 진한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제 등 뒤에 있는 많은 이들과 다시 날개를 펴볼까 합니다. 괜히 날개를 폈다가 세상의 역풍에 제 원치 않는 곳으로 휩쓸려 떠내려 갈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함께 있으니 담담히 제 운명을 받아보려 합니다. 혹 제가 얻을 것이 아무도 흠모하지 않을 거대한 뼛조각일지라도, 지금껏 저를 위했던 모두와 함께 발견한 제 운명에 용기를 실어주려 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서 받은 용기인만큼 저 역시 이제 날갯짓을 시작하려는 누군가에게 용기와 위로를 건넵니다. 제 주머니에서 나온 꼬깃꼬깃한 몇만 원이 지금껏 구겨져 있던 저와 그의 날개 같아 더욱 뭉클합니다. “네 언제든 너를 응원해.”


“당신들이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사십 년 동안, 당신들의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진 일이 없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습니다.”(신8:2-4)


2024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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