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한국에 들어와 제법 큰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결코 담을 수 없는 일의 양과 수의 인원이라 적지 않은 버거움을 느끼고 있지만, 최근 한 명 한 명 독대(獨對)하면서부터는 삶의 경쾌함을 더없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누군가를 만나고, 그의 이름을 묻고, 그에게 다가가며, 그의 존재를 제 안에 넣습니다. 언젠가 같은 지역에서 각자의 갈 길을 향해 서로를 분주히 지나쳐 횡단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서로에게 그러한 무정함을 뒤집어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제 안에 그들의 존재를 담았고, 그들 안에 저의 존재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몸짓, 하나의 눈짓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라는 말은 존재합니다. 동양에서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한 명인 묵자(墨子)가 자신의 대표 사상인 ‘겸애’(兼愛), 곧 ‘아우르는 사랑’을 이야기하며 ‘애인약애기신(愛人若愛其身):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가르쳤고, 서양에서는 예수가 자신이 설파한 가르침 중 가장 큰 가르침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12:31)라고 말했습니다.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큰 가르침으로 내려오고 있는 이 ‘타자를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오늘날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또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점점 더 나 아닌 타인에 대한 인식이 각박해지고 있는 오늘날, 나의 이웃은 정말 나의 몸이 될 수 있을까요.
타자를 나의 몸과 같이 여기라는 말이 소위 터무니없고 허황되게 들려 그저 과장법으로 표현한 이상적인 참사랑이라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 나 아닌 타자는 정말 타자로서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현상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우연히 (故)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시인은 ‘몸짓’과 ‘꽃’과 ‘이름’과 ‘눈짓’이라는 개념으로 대상과 현상, 인식과 존재를 아름답게 표현했지만, 사실 이 시는 그 어떤 타자 없이는 ‘나’라는 존재가 존재할지언정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심도 있게 알려줍니다. 세상에 내가 존재하더라도 그 어떠한 타자 없이 나만 존재한다면 나는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타자가 나를 인식하고, 나를 불러주고, 나를 알아줄 때에야 ‘나’는 진정 존재할 수 있는 것이죠. 나를 인식하고, 불러주고, 알아줄 타자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면, 나는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쉬운 말로 저는 이 세상에 유재석이라는 개그맨이 존재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유재석은 안타깝게도 저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는 하고 있는지, 함께 살고는 있는지 전혀 모를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제 아무리 열심히 쓴다 한들 그 누구도 이 글을 읽어주지 않는다면, 이 글은 사실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원리이지요. 곧 ‘나’라는 존재는 사실 어느 타자가 나를 보고 인식하고 알게 됨으로써 생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타자 역시 제가 보고 인식하고 알게 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죠. 제가 그 타자를 몰랐을 땐, 그 타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적어도 제게는 생명이 아니게 됩니다. 저 역시 세상의 모든 타자가 저의 존재를 모른다면, 저는 살아도 살아있지 않습니다.
너가 아니면 안 돼, 내가 아니면 안 돼
맹자(孟子)의 곡속장(穀觫章)에는 제선왕이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는 측은히 여겨 그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명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하였기에 양은 참을 수 있지만 소는 참을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보고, 인식하고, 앎은 단순히 자료나 정보를 얻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고, 부르고, 인식하고, 아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생명’을 갖게 됩니다. 반대로 보지 않은 것은, 부르지 않은 것은, 인식하지 않은 모르는 것은 비록 존재할지라도 생명을 갖지 못합니다. 곧 나를 보고 불러주고 인식하고 알아줄 어느 타자가 있어야 내가 있는 것이고, 타자를 보고 불러주고 인식하고 알아줄 내가 있어야 비로소 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웃이 남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이웃이 그저 타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너의 존재가 사실은 나의 존재인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사실은 너의 존재인 것입니다. 나를 알아줄 내 이웃이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구성하는 서로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그저 나 아닌 어떤 타자가 어려울 때 선뜻 넉넉히 챙겨주고 돌봐주고 도와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나 이외에 그 어떤 타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너가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너도 없고, 너가 그렇게 존재하듯 나도 이렇게 존재하고, 내가 이렇게 존재하듯 너도 그렇게 존재하고, 너가 아니면 내가 안 되고, 내가 아니면 너가 안 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웃이 나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마주하는 눈동자에서 너와 함께 나를 바라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너는 결코 내가 아니지 않습니다. 너는 결코 남이 아닙니다. 너는 나고, 나는 너인 것입니다.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것' 그것을 깨닫는 것이, 그것을 아는 것이, 그렇게 타자를 바라보는 것이 참사랑의 시작입니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곧, '너와 나를 구분 짓지 않는 사랑'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
다시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묻고, 그들을 알아가며 그들의 생명을 제 안에 하나하나 새로이 품고 있습니다. 저의 생명 또한 새롭게 만난 그들에게 의탁하고 있죠. 그렇게 저와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구성하는 서로의 몸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서로 안에 있는 서로의 생명을 마주하여 만날 때면 우리는 '생기'(生氣), 곧 '생명의 기운'을 '나'인 '너'에게서, '너'인 '나'에게서 주고받습니다.
이 밤, 잠시 제 안에 살아있는 수많은 이웃들의 생기를 느껴봅니다. 또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웃 안의 저의 생명도 떠올려봅니다. 저의 생명을 품고 있는 모든 이들이 어디에서나 무탈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제 품 안에 살아있는 모든 이들이 어디에서나 무탈하기를 기도합니다. 제 안에 있고 그들 안에 있는 나와 네가 모든 순간 행복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막12:31)
2024년 10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