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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일오 Jul 30. 2023

두려워 맙시다. 삶(live)을, 악(evil)을

인간을 삼켜버린 현실, 현실에 저항하는 인간


    요즘 혼자서 보드를 배우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태권도와 스케이트 보드는 한 번쯤 배워보고 싶었는데 마침 우연히 간 대형마트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보드를 팔고 있더라고요. 물론 그렇게 보드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산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살까 말까 보드 앞을 서성이다가 그냥 돌아온 날이 수일이었습니다. 저는 발목 수술도 잦았고, 무릎도 좋지 않고, 기껏 타봐야 이제부터 4개월이고, 아무리 저렴한 스케이트 보드라도 김치볶음밥과 간장계란밥만 먹는 제게 보드는 정말 큰 지출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새롭게 하기로 한 일은 예정보다 많이 늦어지고, 얼마 전 보드를 타다가 넘어졌을 땐 정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이 지출이 과연 지금 내 처지에 맞는 것일까’라는 계산적인 생각과 ‘여기서 발목 한번 더 다치면 정말 큰일 난다’는 두려움은 예상 그대로 제게 찾아왔죠. 이런 걱정과 두려움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보드를 사기까지 그렇게나 망설였었습니다.


 한창 이력서를 돌릴 때, 보드 앞을 서성거리기만 했던 것처럼 아주 고급진 레스토랑 앞을 서성거리다가 그냥 돌아온 적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경력도 없고 영어도 부족하고 뭐 하나 특출 나지 않은 제가 그곳에서 일할 순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저 앞을 서성이다가만 돌아온 것이죠. 만에 하나 그곳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제가 가진 능력들로는 쪽팔림만 당하다가 잘릴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차라리 종이값을 아끼자’는 이상한 자기 합리화로 시도도 해보지 않고 집에 돌아온 적이 꽤나 많았었습니다. 해봐야 아는 것들이 세상에 수두룩인데 너무 계산적이 되어서, 너무 겁을 먹어서, 바람에도 불구하고 해보지도 않는 제 모습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어쩌면 제 일생에 선택과 도전은 제 나름 될 법한 것들 안에서만, 제가 과도하게 안전한 것들 안에서만 이뤄지지 않았을까요. 삶에 너무 계산적이어서, 삶이 너무 두려워서 말입니다.


삶(live) 속에 숨어 있는 악(evil)


    ‘현실적으로.’ 이 말을 한 번쯤은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저 또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와 대화하다가 ‘현실적으로’라는 말을 뱉게 되었는데, 순간 이 ‘현실적으로’라는 말이 언제부터 이렇게 암울하게 다가오는 말이 되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혹은 그 말이 내 머릿속을 차지하는 순간 우리는 얼어붙습니다. 한계를 긋습니다. 꿈꾸는 것을 막고, 내 안에 이는 자유와 열정과 사랑과 행복을 접어둡니다. 삶이라는 현실 앞에 너무 겁을 먹어서, 삶이라는 현실 앞에 너무 계산적이 되어서, 삶이라는 현실 앞에 놓인 나 자신을 너무 잘 알아서 우리는 ‘현실적으로’라는 말 앞에 ‘나다움’을 거두어들입니다. 삶이라는 현실은 나를 나로 살지 못하게 하고, 삶이라는 현실 앞에 우리는 나 스스로를 ‘용인’(容認: 용납하여 인정함) 하지 않습니다. 삶이라는 현실은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이렇게 참 슬픈 세계가 되었습니다.


 (故) 이어령 선생님은 ‘살아간다’는 뜻의 영어 ‘live’를 거꾸로 하면 놀랍게도 ‘악’이라는 뜻의 ‘evil’이 된다고 말하며 삶(live) 속에 악(evil)이 숨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나를 나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경탄할 것들에 경탄하지 못하게 하고,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오늘날의 ‘삶’이 곧 ‘악’과 같습니다. 악은 오늘날, 삶의 모습을 한 채로 우리의 자유도, 시간도, 시선도, 소원도, 희망도, 사랑도 빼앗아갑니다. 인간 안에 있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앗아갑니다. 삶 속에 숨어 있는 악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삶에 대한 두려움뿐입니다. 그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나를 위한 일에 인색하도록 만듭니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고, 자신을 위한 마음은 가볍게 대해도 되는 것처럼 만듭니다. 오늘날의 무한 경쟁사회와 실리만을 따지는 기계 사회 속에서 ‘자아실현’(自我實現: 자아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안타깝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삶’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삶이 주는 두려움은 남을 위한 마음도 인색하게 만듭니다. 토론토 대학의 조던 피터슨(Jordan Bernt Peterson) 교수는 한 연설에서 우리 안에 삶에 대한 두려움만 없다면, 지금보다 서로를 더욱더 사랑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싶을 때도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리곤 합니다. ‘나도 먹고살기 힘든데’ ‘내가 지금 누굴 도와줄 형편이 되나?’ ‘내가 주면 다시 내게 돌아오긴 할까?’ ‘도와주는 건 곧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말 그대로 오늘날 우리는 모두 나 ‘살기’ 바쁘지 않습니까? 그렇게 삶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거저 주지 못하게 하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데 인색하게 만듭니다. 참된 나를 향한 마음도, 남을 위하는 마음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곧 오늘날 ‘삶’(live) 속에 숨어있는 ‘악’(evil)입니다.


하늘의 우산과 현실에 저항하는 인간


    삶이라는 현실에 잠식되어 살아가는 우리와 다르게 아이들은 자아실현을 하는데 거침이 없습니다. 어른이 된 우리가 볼 땐 알맹이 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나름 참된 자신을 찾기 위해, 참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이것저것 호기심을 갖고, 여러 곳곳 사방팔방을 뛰어다닙니다. 뛰어다니며 만나는 다양한 것에 감탄하고 매료되기도 하죠. 또 아이들은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것에 스스럼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일렁이면 그들은 생각할 것도, 계산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려고 합니다. 그 내미는 손을 막는 것은 어쩌면 이미 삶에 상당 부분 잠식당한 저와 같은 어른들이겠습니다. 저는 어쩌면 이 아이들의 모습이 삶에 잠식당하기 전의 우리의 참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부모님이라는 우산 아래서 보호받으며 삶에 대한 그 어떤 걱정과 두려움 없이 자유와 사랑, 작은 것에도 경탄하는 마음을 잃지 않은 우리의 참모습 말입니다.


 아이들처럼 삶에 잠식당하지 않고, 선한 자유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미 어른이 된 우리에게도 부모의 우산이 필요합니다. 이는 ‘먹고 살 수 있을까?’ 곧,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하늘 아버지의 우산'이죠. 그래서 저는 이 각박한 삶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시시로 하늘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삶만을 향해 주시하던 시선을 하늘로 옮겨야 합니다. 푸른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저 새를 바라보며, 척박한 땅에서도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저 꽃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것들을 거저 먹이시고 거저 입히시는 하늘 아버지를 떠올려야 합니다.(마6:25-31) 그래야 우리는 그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늘 아버지의 우산 아래서 우리의 참모습을 잡아먹는 ‘악’(evil)이라는 ‘삶’(live)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고귀한 모든 것을 앗아가는 이 삶에 저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말 ‘현실적으로’ 삶이 주는 두려움 속에 너도나도 먹고살기 바쁘지만, 삶이라는 현실에 완전히 잠식당하는 순간 우리 안에는 참된 나의 모습도, 아름다운 만물에 경탄하는 모습도,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도 사라집니다. 현실에 휩쓸리는 순간 우리 안에 있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참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가 자연의 모든 것을 거저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걱정하지 말라, 내가 이처럼 너희를 먹이고 입히리라’ 약속하시는 그 보호는, 삶이라는 악에 잠식당하지 않고 그 아름다운 참 인간의 모습으로 살게 하려는 하늘의 약속입니다. 처음 지어진 모습 그대로 살게 하기 위해, 아름답게 짜여진 만물에 경탄하며 살게 하기 위해, 서로를 사랑하며 사는 참 인간의 모습 그대로 살게 하기 위해 하신 보호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참된 모습들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현실이 곧 그 보호의 약속을 받은 우리가 꿈꾸고 만들어야 할 세상입니다.(마6:33) 정말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진다면 암울하게만 다가왔던 ‘현실적으로’라는 말도 우리에게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될 날을 오늘 한번 꿈꿔봅니다.


 오늘 시간을 내어 하늘을 한번 바라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니면 삶이 주는 두려움에 저항하는 일을 한 가지 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작지만, 저 나름 보드를 사서 배워보고, 브런치 작가도 신청해 보고, 오래전부터 연락하고 싶었던 한 친구에게도 조심스레 안부(否)를 물어봅니다. 누구 보기엔 작고 초라한 것들일 수 있겠지만,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저 나름의 삶에 저항하는 자세라 생각합니다. 우리 삶을 너무 두려워하지 맙시다. 삶에 너무 계산적이지도, 삶을 너무 두려워하지도 맙시다. 하늘의 보호 아래서 나를 용납하고 서로를 사랑합시다. 하늘을 바라보면 오늘도 역시 하늘 아버지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두려워 말라 삶(live)을, 악(evil)을. 너희는 이 많은 새와 꽃보다 귀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6:25-31, 33)


2023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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