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일오 Aug 19. 2023

피곤하겠지만, 우리 오늘 만날래요?

Hi, how are you?


    얼마 전 오랜만에 근교로 출사를 나갔습니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에 있던 한 인도 친구가 제게 말을 걸더라고요. 저는 잘 되지도 않는 영어를 써가면서 열심히 대화를 이어 나갔습니다. 생각해 보니 집 앞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자신도 여기 근처 산다고 소개하며 말을 거는 친구들이 꽤 많았습니다. 강아지와 함께 산책할 때면 주머니에 강아지 간식을 넣어 다니는 이웃들이 간식을 건네며 말을 걸곤 하죠. 이전에 마트에 갔을 땐 당연히 처음 보는 직원에게 삼각대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가 직원의 여자친구에 대해 10분이 넘도록 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토론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발 디딜 틈 없는 만원 버스에서도, 줄이 밀려있는 식당이나 카페에서도, 비가 오고 있는 공원에 앉아서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기선 직원과 손님이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모습을 자주 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오늘 처음 보는 사이겠지만, 오늘 친구가 됩니다. 또 토론토에서 키오스크(kiosk)는 맥도널드에서밖에 못 본 것 같습니다. 마트를 가더라도 더 편리하고 빠른 무인 계산대를 이용하는 사람보다 시간을 더 들여 직원에게 직접 계산을 맡기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특정 대형마트에 가면 줄은 한도 끝도 없이 길고, 계산을 맡은 직원들은 10명이 넘고, 간단한 계산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무인 계산대는 없습니다. 빨리 일을 봐야 할 경우에는 이러한 모든 상황들이 굉장히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역시나 여기는 ‘사람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습니다.


넌 누구니? 넌 무엇이니?


    가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참 삭막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을 거치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이 주변에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꼭 사람을 거쳐야 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 사람이 정말 사람인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무런 감정도 없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자면 키오스크 앞에서 느끼는 차가움을 그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마주할 때면 차라리 힘든 내색이라도 해줬으면 싶습니다. 그들 역시 그곳에서 사람으로서의 ‘자아실현’(自我實現)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터에 들어선 순간, 그들은 마치 기계의 한 부품이 되어 ‘일’할 뿐이고, 이 ‘일’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시계만 들여다볼 뿐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그런 차가운 사람들을 꽤 자주 스치듯 마주하죠. 나중에는 아마 기계같이 삭막한 사람이 아니라, 진짜 기계가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되는 날이 올 것 같습니다. 그때가 돼서는 기계같이 삭막한 사람의 태도와 목소리라도 그리워지지 않을까요. 확실하게 말할 순 없겠지만, 이대로라면 어딜 가더라도 사람 냄새는 점차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동양 사상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으로 만들어지고 해석됩니다. 즉 인간이란 존재는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존재라는 말이죠. 하지만 오늘날 인간을 만드는 인간관계를 누군가와 맺는다는 게 퍽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너도나도 기계 사회 속에 치여서 인간 그대로 살아가는 순간이 많이 없을뿐더러, 그런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여 관계를 맺는 시간은 더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자신과 관계를 맺자, 자신을 길들여 달라”고 말하지만, 처음 어린 왕자의 대답은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없는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우는 어린 왕자의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인내심은 당연히 ‘시간’을 필요로 하죠.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고 만들어지는 것이 인간일진 데, 바쁘고 바빠 우리가 인간으로 살 시간도 별로 없고, 바쁘고 바빠 그중에 서로 간에 관계 맺을 시간도 없으니, 건강한 인간이 만들어지기 참 어렵다는 생각을 간혹 합니다. 더욱이 앞서 말했듯 점차 인간을 거치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는 시대 아닙니까? 인간과 관계 맺을 시간도 없고, 인간을 마주칠 필요도 없는 우리 사회가 점점 인간을 마주하고 관계 맺기 어려워지는 사회로 변해갑니다. 과연 이런 사회가 건강한 인간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故) 신영복 선생님은 이런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만남이라고 말하기도 짧은 만남, 겉만 잠깐 부딪히는 만남이라는 뜻의 표현이죠. 정말 (故)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대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서로 보지 않고, 서로 만나지 않고, 서로 관계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회입니다. 그저 잠깐의 부딪힘으로도 돌아갈 수 있는 사회입니다. 얼굴 없는 생산과 소비로 너와 내가 굳이 마주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이 일꾼을 대체할 일꾼은 너무나 많아진 사회에 인간은 부품처럼 소비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게 부딪힘만 있는 당구공끼리의 관계에서 타자는 내게 그 어떤 의미도 아니게 됩니다. 잠깐 마주치는 대상이나, 일회적인 관계나, 길들여지지 않는 사이에서는 배려도 존중도 부끄러움도 필요 없습니다. 관계가 없으니, 다음을 고려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사정도 모르는 인터넷 속 누군가에게 심한 욕설을 가해도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몇 마디 말조차 나눠보지 않은 타자가 당한 부당함은 내게 아무런 의미 그 이상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참 떠들썩한 ‘묻지마 범죄’는 그 끝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건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좋은 게 다 좋을까


    얼마 전 지인의 SNS를 통해 제가 나고 자란 교회의 여름 수련회 예배 준비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전문가인 동생 한 명이 텅 비어 있는 예배 공간을 뚝딱뚝딱하더니 금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무대가 멋지게 만들어졌죠. 그런데 왜인지 그 동영상을 자꾸만 돌려보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장면도 없었고, 누군가와 동선이 꼬이는 장면도 없었고, 누군가는 일하는데 누군가는 자기 악기 소리 확인하겠다고 시끄럽게 하는 장면도 없었습니다. 오고 가는 큰소리는 없었지만, 오고 가는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빠른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멋진 무대가 만들어졌지만, 말 그대로 ‘무대를 설치하는 일’, 그것이 다였습니다. 물론 옛적과 비교하면 얼마나 효율적입니까? 전문가 혼자 일을 하면 일을 하는 사람도 편하고, 덕분에 많은 사람도 편해집니다. 그리고 미숙하게 우왕좌왕하며 같이 하는 것보다 전문가 혼자 하는 것이 훨씬 빠를 수도 있습니다. 정말 굳이 불편하게 시간도 다 같이 내어 엎치락뒤치락하는 것보다야 혼자 뚝딱뚝딱 효율적으로 하는 게 모두가 편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일’ 말고 딱히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장면을 볼 때면 함께하는 불편함과 어려움과 미숙함이 오히려 그 외의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편한 게 편한 것이고, 그런 현실에 순응하며 사는 게 더욱 편한 길이겠습니다. 이는 두말하면 입 아프겠죠. 돈이 전능을 나타내는 오늘, 돈에 맞추어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계산하면 오늘날을 사는데 그리 걸릴 것이 없습니다. 돈을 벌면 되고, 돈으로 사면 되고, 돈으로 계산하면 됩니다. 하물며 사랑도, 생명도, 사람도, 삶도 말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효율과 편리가 참 중요합니다. 이익과 쓸모가 참 중요합니다. 모두 돈과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일까요. 오늘날은 사람도 쓸모의 관점으로 가치가 판단되고, 세상도 모두 효율의 관점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느끼다시피 생명이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 효율과 편리, 이익과 쓸모로만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을 효율로 계산한단 말입니까? 어떻게 사람이 쓸모의 관점으로 판단된단 말입니까? 이는 감히 성립되지 않는 계산법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효율과 편리, 이익과 쓸모로만 모든 것을 따지는 오늘날의 사회가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기계 사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현실에 순응하며 무뎌지는 순간 우리는 기계 사회 속 기계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겠죠. 우리는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이런 기계 사회에 발버둥 쳐야 합니다.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우리는 때때로 인간으로서의 불편함을 선택해야 하는 겁니다. 불편함이 우리 인간의 정신을 깨울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육지로 데리고 올 때, 탱크 속에 반드시 정어리의 천적인 메기를 함께 넣는다고 합니다. 그 탱크 안에서 정어리는 메기로부터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발버둥 치게 되는데, 그 정어리들의 발버둥이 정어리를 더욱 살아있게 만든다는 것이죠. 즉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더욱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나 이제 너를 알아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장자(莊子)는 언제나 ‘생명’을 가장 중시하면서 ‘정신의 자유’를 우선으로 강조했다고 합니다. 이 글에서 정신의 자유를 이야기해 보자면 곧 이전의 문제점을 찾고, 그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자는 것이겠죠. 오늘에 비추어보아 반생명적인 어긋난 길에서 벗어나 진정 생명으로 향하는 길로 다시 과녁을 조준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Metanoia, 회심(回心)’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뉘우침과 함께 ‘전향’(轉向: 방향을 바꿈)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세상의 반생명적인 논리에서 생명과 사랑의 논리로의 전향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보지 않아도 살 수 있고, 만나지 않아도 살 수 있고, 관계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더욱이 효율과 편리, 쓸모와 이익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람보단 돈이 우선인 사회를 살고 있죠.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떠내려오는 현실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막막할 때, 언제나 당장 앞의 한걸음만을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굳이 겪지 않아도 될 불편함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한 걸음을 내디뎌봐야겠습니다. 오늘은 의도적으로 사람만을 마주해 보고, 산책 중에 만나는 이웃에게 먼저 말도 걸어봐야겠습니다. 누구에겐 관심을, 누구에겐 안부를 물어야겠습니다. 또 이번 주는 누군가와 시간을 들여 관계를 맺어봐야겠습니다. 살갑게 웃고, 힘차게 걷고, 인간이 가지는 사랑의 감정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사람 냄새가 좀 나는 불편함과 미숙함과 어려움을 지고 지내봐야겠습니다. 혹시 여러분 안에는 사람이 가지는 따뜻함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다행히 남아 있다면, 그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한 따뜻함을 누군가와 함께 나눠보는 건 어떻습니까?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주인공 동훈은 원래 아무것도 아닌 사이도 말 몇 마디 서로 나누고 얼굴 몇 번 마주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아니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나눕시다. 우리 모입시다. 우리 만납시다. 조금은 피곤해도, 조금은 어색해도, 조금은 불편해도 말입니다. 그 미숙함과 어색함과 불편함이 우리 사는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10:23-25)


2023년 8월 18일

매거진의 이전글 두려워 맙시다. 삶(live)을, 악(evil)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