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일오 Sep 25. 2023

우리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당신을 응원합니다.


    오늘도 8시 알람에 맞춰 눈을 뜨지만 이내 1시간 타이머를 맞추고 부족한 잠을 조금이라도 더 채웁니다. 이후 찌뿌드드한 몸을 힘겹게 일으켜 출근 준비를 마친 후 잠깐의 개인 시간을 가지고 밖을 나섭니다. 오늘 역시 잠을 이기지 못하고 느지막이 일어난 죄책감에 지하철에 앉자마자 책을 펼쳐보지만, 그마저도 1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꾸벅꾸벅 머리를 떨굽니다. 1시간 30분가량 걸렸을까요 일터 근처에 있는 캐나다 국민 카페 Tim Hortons에 도착해 Small size Double-Double(블랙커피에 설탕 2개 크림 2개를 넣은 달달한 커피)과 BLT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바로 앞 작은 공원에 앉아 간단한 점심을 먹습니다. 이 시간만큼은 귀에 이어폰도 꽂지 않고 메모할 것이 아니라면 핸드폰도 보지 않습니다. 그저 오늘도 흐르고 있는 하늘과 오늘도 활기차 보이는 땅의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배와 맘을 채울 뿐입니다. 20분 안팎의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제게는 아주 질적으로 귀중한 시간입니다. 숨을 고르는 시간이죠. 아침 11시에 집에서 나와 밤 11시에 집에 도착하는, 어쩌면 캐나다답지 않은 생활을 보내고 있지만, 이 짧은 시간을 한껏 만끽하고 나면 벌써부터 캐나다에서의 하루하루가 아쉬워지곤 합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어디서 어떻게 이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달까요. 분명 일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시간 때문에 이 나날들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름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길을 나설 땐 여전히 설레고, 낯선 사람을 마주할 땐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낯선 사랑을 느끼곤 합니다. 다만 전보다 상대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하늘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짤막한 시간들을 제외하고는 그저 부랴부랴 하루를 감당해 내기 바쁠 뿐이죠. 삶의 분주함 때문에 많은 것들이 나중이 되었습니다. 이런 제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가끔은 이런 제가 낯설어지기까지 합니다. 평소엔 어머니가 참 많이 보고 싶었는데 하늘 볼 시간조차 많이 없어지면서부터 아버지가 참 많이 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초록 잎사귀가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갈 때쯤, 아버지께 문자를 보냈습니다. “아버지, 궁금한 게 있어요.”


누군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살고 싶지 않겠느냐


    저에게는 존경하는 아버지가 한분 계십니다. 7살에 뇌수막염으로 청력(聽力)을 잃고, 남들과는 다른 ‘조용한 세상’을 살아오신 아버지십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가 듣는 세상만큼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학교는 아버지를 제 나이에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10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16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2년간 타일공(건설 공사장에서 타일 붙이는 작업을 하는 노동자)으로 막일을 하다가 18살이 되어서야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마저도 일반학교에서는 청각 장애인인 아버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제칠일안식일재림교회(第七日安息日-再臨敎會)에서 운영하고 있는 종교법인 학교만이 아버지를 학생으로 받아주었죠. 비록 한국에서 이단으로 지목받고 있는 교단이지만, 그래도 종교법인이라 일반학교에서는 받아주지 않는 아버지를 그 학교는 받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21살에 느지막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아(聾啞: 청각 장애인과 언어 장애인을 아울러 이르는 말) 학교로 곧이어 들어가, 24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만, 7살 아이에서부터 21살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삶은 여간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벙어리’ ‘귀머거리’라고 놀려대니 반 아이들과 싸움질을 하기도 하고, 남들보다 몇 박자 늦게 시작한 배움으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책을 읽기도 하고, 때로는 잔인했던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학교를 쉬기도 했죠. 하지만 그마저도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밥값이라도 하라고 다그쳤기에 아버지는 어떤 일이든지 천대받으면서 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순 있겠으나, 그 누구도 그 맘을 차마 쉽게 이해할 순 없습니다. 언제나 상상은 현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이런 아버지만큼 이상을 바람에도 현실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꿈꿨던 것들이 참 많았을 텐데 불의(不意)에 닥친 장애라는 삶의 조건 때문에 그저 현실을 살기에 바빴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삶을 살아내야만 했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역시나 아버지에게 ‘이상적인 꿈’이란 참 허황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간혹 아버지께 제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사11:9)을 넌지시 밝혀 보일 때면, 아버지는 걱정 어린 마음으로 저를 바라보시고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중 제가 대학원을 졸업하기 전에 아버지께 받았던 편지의 내용은 참으로 슬펐습니다. “누군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살고 싶지 않겠느냐? 현실이 그렇지 못해서 끌려가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 뿐이다. 아빠도 그중의 한 사람이고.” 이 말에 누가 고개를 저을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언제나 아버지의 진심이 담긴 조언들에 말 한마디 붙일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누군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세상엔 그저 다양한 삶의 장애(障礙)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중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오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을 뿐입니다. 그들이 수많은 장애 속에서도 어떻게든 지켜내 온 삶을 마냥 현실과 타협했다고 가볍게 말하기엔, 그것이야말로 너무 비인륜적(非人倫的)인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땅에서 현실에 맞추어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지켜낸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영웅이란 말은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받은 자들의 책임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그런 아버지 밑에서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을 꿈꿉니다. 하늘 볼 새도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내야만 했었던 아버지 밑에 현실보다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아름다운 세상(마6:10)을 꿈꾸는 아들이라니요. 치열하게 살아온 아버지 입장에서는 꿈쟁이인 제가 그저 기가 찰 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아버지가 제 위에서 현실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오셨기에 제가 그 아래에서 현실에 그리 잠식당하지 않고 꿈꾸며 살아올 수 있었고, 그렇기에 이제 그 아래에 있는 저에게는 그에 대한 다른 책임(責任)이 새롭게 생겼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도 처음엔 모두 함께 꿈꾸었던, 그 생명과 사랑이 가득한 아름다운 하늘의 세상을 이 땅에서 만들어갈 책임 말입니다.


 생명과 사랑이 가득한 아름다운 하늘의 세상을 싫어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자신과 이웃의 존엄함을 다양한 모습 그대로 존중하고, 자신도 이웃도 그저 하늘 아래 사랑받는 정체성임을 확립하고, 그런 이들이 함께 모여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며 서툴지만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그 어느 누가 거절하겠습니까. 맘몬(Mammon)이라는 절대 권력 아래 무한 경쟁으로 돌아가는 이 사회도 돈 때문에 생명과 사랑과 존엄이 침식당하는 오늘날에 대해 ‘이것이 본래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습니다. 물론 앞서 이야기했듯 현실이 그렇지 못해 끌려가는 것이 불가항력이라 말할 순 있겠지만, 혹시나 보호의 우산 아래 조금이라도 책임을 질 수 있는 자들이 지금 거기 있다면, 우리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저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責任)이자 사명(使命)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엡5:1-2) 정말 우리가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늘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면, 하늘이 우리 편이 되어 우리의 손을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저의 가능성보단 하늘의 가능성을 신뢰함으로써 희망을 보고, 그 희망으로 무너지지 않으며, 오늘 제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겠습니다. 제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는 확신(빌1:6)을 가지고 말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몇 주 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의 윤순진 교수님이 tvN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와 환경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말로 왜 스스로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밀어내는가? ‘나도 함께 해야지’라는 말로 나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들여야 한다. 미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진다.” 참 와닿는 말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내용도 모두가 봤으면 하는 마음에 해당 회차를 남겨놓습니다.(2023년 8월 30일 209회) 정말 교수님의 말씀대로 미래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고정적인 미래가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외부에서부터 우리에게로 닥쳐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변화 또한 외부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철없는 21살이 어느 날 28살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철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변화는 내부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고, 미래는 우리의 변화로부터 바뀌기에, 변화도 미래도 결국은 우리의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 모두가 이전엔 꿈꿔왔고, 지금 다시 꿈꾸는 생명과 사랑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은 지금 우리의 내부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를 통해 현실에 무참히 무너지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인간은 파괴당할 수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아.” 예, 우리는 망망한 바다 같은 현실에 파괴될 수 있어도 결코 패배하지는 않습니다. 파괴될 순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직 삶에 지지 않았고, 우리는 절대 패배하지 않습니다. 아직 지지 않은 여러분, 이제 시작입니다. 이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각박한 삶 속에서도 계속 꿈을 꾸기를 바랍니다. 인색한 삶 속에서도 계속 사랑을 나누길 바랍니다. 누군가는 ‘지향 자체가 용기’라고 말합니다. 꿈꾸기 어려운 현실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 용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갑시다. 우리 모두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하늘은 그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사6:8) 오늘도 삶에 지친 모든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와 돌보심이 있기를 기도하고, 오늘도 담대하게 하늘의 꿈을 향해 걸어가려는 이들에게 하늘의 응원과 평안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빌1:6)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 후 1년은 전자회사, 4년은 부품회사에 다니시다가 30살에 신학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지금은 소외되고 억눌린 농아인들의 설 땅이 되어주려고 노력하며, 그들과 함께 하나의 작은 가족의 형태를 만들어 이 땅의 작은 하늘나라를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2023년 9월 24일

매거진의 이전글 피곤하겠지만, 우리 오늘 만날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