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cob Oct 30. 2023

무엇이 생명을 살게 할까

먹고 먹히고 먹고 먹히고


    캐나다에서 Thanksgiving day를 보냈습니다. 캐나다에서 Thanksgiving day는 한국의 추석처럼 주로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는 명절이라 저는 이 시간을 상대적으로 외롭게 보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 풍요롭게 보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낯선 땅에 홀로 발붙여 살고 있는 제게 다양한 음식과 함께 안녕(安寧)을 물어왔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한동안 비어있던 냉장고와 조용했던 핸드폰이 요란했달까요. 이날 많은 이들이 물어온 안부와 건네준 음식을 먹으며 제 안의 생명은 또 한 잎 청량한 잎사귀를 피웠습니다. 어쩌면 낯선 땅 인디언의 도움으로 시작될 수 있었던 이 Thanksgiving day를 날에 맞게 보낸 게 아닌가 싶네요. 지금껏 이곳에서 저를 도와준 많은 이들이 없었더라면 분명 저는 이 낯선 땅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건네준 음식과 손길 곳곳에는 따스한 생명의 온기가 담기어 있었고, 저는 그 생명을 느끼고 먹음으로써 부끄럽지만서도 자랑스러운 오늘의 저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이겠죠. 기꺼이 자신과 자신의 것을 내어준 그들이 참으로 고마운 오늘입니다.     


당연한 이야기: 먹어야 삽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먹어야 삽니다. 이 땅의 모든 생물은 무엇이든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곧 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먹는다는 행위는 다른 것과는 다르게 어떤 대상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어떤 것을 볼 때도, 들을 때도, 맡을 때도, 만질 때도 대상은 여전히 외부에 존재해 있지만, 내가 그것을 먹는 순간 그것은 외부에 존재해 있지 않습니다. 내가 먹을 때, 그 대상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만들고, 마침내는 내가 됩니다. 즉 먹음은 대상을 나로 만드는 행위이자, 나의 생명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세계를 보면, 비와 태양을 식물이 먹음으로 식물은 생명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식물을 동물이 먹음으로 동물은 생명을 갖고, 그 동물을 무엇이 또 먹음으로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을 갖습니다. 모든 생명의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먹음’으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음식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의 피와 땀과 눈물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하물며 우리를 출산하실 때라도 우리는 그 어머니의 피와 땀과 눈물을 먹었기에 생명이 되었습니다. 생각과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생각도 사상도 글도 혼자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먹어왔기에 지금 내 생각과 내 글과 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어떤 무엇과 어떤 누군가를 먹었고, 그 어떤 무언가와 누군가는 그만큼 우리에게 먹혀왔습니다. 먹어야 사는 이 세계에서 지금 우리의 생명은 곧 지금껏 우리가 먹어왔던 모든 생명의 무게가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홀로 나 된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나 홀로 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먹으며 살아왔고,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이상한 이야기: 먹혀야 삽니다


    이상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또 먹혀야 삽니다. 식물이 비와 태양 속에서 열심히 꽃을 피우고 꿀을 만들지만, 그 꿀은 결국 벌과 나비들에게 먹힙니다. 식물들이 열심히 수분을 빨아올려 열매를 맺어도 이 열매는 결국 새와 동물에게 먹힙니다. 이는 애써 먹으며 살아도 결국 누군가에게 먹혀버리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의 시스템은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꽃은 벌과 나비에게 자신의 꿀을 먹힘으로 암수 두 꽃술의 수정을 이루어 생명을 확장시켜 나가고, 나무는 새와 동물들에게 자신의 열매를 먹힘으로 씨앗을 멀리 퍼뜨려 생명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모두 ‘먹힘’으로 생명을 확장하고 널리 퍼뜨리는 겁니다. ‘먹힘’으로 생명을 존속(存續)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국립공원 옐로우스톤(Yellowstone National park)에서는 실제로 한 실험을 통해 먹힘이 그 생명과 종족을 보존, 유지하는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초원의 토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늑대무리를 모두 공원에서 내쫓았죠. 하지만 먹힘이 없는 초원의 토끼 무리는 결국 초원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개체수가 늘어나 전멸(全滅)을 당합니다. 초원이 먹기만 하는 토끼 무리들에 의해 사막이 된 탓이죠. 먹힘 없이 먹기만 한다면 자연의 질서는 깨지기 마련이고, 깨진 자연의 질서 아래에선 그 어떤 생명도 살 수 없습니다. 먹혀야 살고, 먹힘이 살게 하는 것입니다. 먹힘은 대상에게 나를 주어 나를 넓히는 행위이자, 나를 살게 하고, 나의 생명을 넘어 보다 넓은 생명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있을 때 보다 강력한 생명의 힘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어떤 이유에서였든지 제가 지칠 때 저를 일으킨 것은 신기하게도 저에게 오는 어떤 위로와 응원이 아닌, 그저 저를 통해 무엇을 듣고 보고자 했던 한 고등부 아이의 반짝이는 눈망울이었습니다. 그 눈망울이 저를 계속 일으켰습니다. 지칠 때마다 저를 일으켜준 생명력은 저의 ‘먹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저의 ‘먹힘’에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당시는 코로나 시국이었던지라 얼굴의 대부분이 마스크로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시간을 그 아이의 눈만 볼 수 있었지만, 그 반짝이던 눈망울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기억 속 그 아이의 눈망울은 지금도 여전히 저에게 생명의 힘을 줍니다. 그 눈망울 앞에서 절망을 꺾고 죽음을 녹이는 힘은 ‘사랑’에 있음을 이야기했던 대로, 그 뱉었던 말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생명의 힘을 말입니다. 그 아이는 언제나 저에게 아낌없이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지만, 정작 진짜 고마운 쪽은 저인 것입니다. 생명의 힘을 받는 쪽은 제 쪽이다 이 말입니다.     


 부모는 자신이 가진 모든 피와 땀과 눈물을 짜내어 아이에게 줍니다. 아이는 그 부모의 헌신을 먹으며 살죠. 아이는 그 부모를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부모는 아이에게 먹힘으로 삽니다. 먹힐 때 생명력을 얻습니다. 나를 먹는 존재가 나의 삶을 존속시킵니다. 당연히 먹음으로 살지만, 신기하게도 먹힘으로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먹으면서 살 때 느껴지는 생명력보다 먹히기 위해서 살 때 느껴지는 생명력이 더 강할 때도 있습니다. 어디서 보았는데, 자기 인격성의 절대적 가치와 존엄을 아는 ‘자존감’은 누군가가 나의 필요를 채워줄 때(내가 먹음)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일 때(내가 먹힘) 더 크게 상승한다고 합니다. 예, 신기하게도 내가 먹힐 때, 나의 생명의 절대적 가치와 존엄을 더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약육강식의 세계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으며 살아남는다고 이야기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잡아먹는 쪽이 잡아먹히는 쪽에 생명을 의탁(依托)하고 있습니다. 식물이 없으면 초식동물이 살 수 없고, 초식동물이 없으면 육식동물이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잡아먹는 모습은 마치 육식동물이 가장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육식동물이 ‘기생’(寄生)하는 것입니다.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에 기생하고, 초식동물은 식물에 기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의탁받은 쪽이, 오히려 먹히는 쪽이 생명의 근원(根源)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아이를 먹여 살리지만, 아이가 부모의 삶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어야 살고, 먹음이 곧 생명을 주지만, 우리는 또 먹히며 살아왔고, 먹힘이 또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생명을 채울 수 있는 것


    우리는 먹으며 살지만, 또 먹혀야 삽니다. 생명의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생물이 먹고 먹히는, 포식(捕食)하고 기생(寄生)하는 ‘의존’(依存) 관계로서 함께 공존(共存)하며 삽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너무 먹는 것에만 익숙합니다. 먹는 것만이 살아남는 것이고, 약육강식의 표현대로 먹는 자만이 곧 강한 자로 나타납니다. 오늘날의 사회도 내가 누군가를 잡아먹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가만 보면 먹으려고만 경쟁하는 사람이 결국 짊어지고 가는 것은 ‘생명의 고갈(枯渴)’입니다. ‘생명의 공허(空虛)’입니다. 먹으면서 살아남는 것 같지만, 먹기만 해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속성은 ‘흐르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죽은 것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흐르지 않는 강은 죽은 강입니다. 흐르지 않고 고여있다면 그 물은 썩을 수밖에 없고, 썩은 물에서는 결코 생명이 살 수 없습니다. 더 넓은 세상, 바다로 계속해서 흘러야만 그 강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흐를 때 생명이 있고, 흐르는 것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언제나 ‘사랑’에 의거(依據)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상대에게 나를 기꺼이 내어주는 ‘먹힘의 행위’이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곧 기꺼이 내어준 상대를 내가 받는 ‘먹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류가 ‘생명의 흐름’이며, 이 생명의 흐름엔 언제나 ‘사랑’이 통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흐름에는 ‘사랑의 교류(交流)’가 있는 것입니다.


 먹고 먹히는 모습을 어떻게 사랑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냐고 물을 수 있겠습니다. 그저 보기엔 약육강식의 ‘강자의 먹음’과 ‘약자의 먹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문학이, 신학이, 자연이, 우리네 삶이 항상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그 너머의 시선과 차원과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는 모든 만물은 4개의 원소(불, 물, 땅, 공기)로 구성되어 있고, 그 4개의 원소가 서로 혼합되어 만물을 만들어 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사랑’과 ‘미움’의 힘에 의해 혼합되고 분리된다고 표현했죠. 곧 만물은 사랑과 미움의 힘으로 창조되고 파괴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 엠페도클레스는 이 현상을 인력(引力: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물체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힘.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 사이나 서로 다른 부호를 가진 전하들 사이에 작용하며, 핵력 때문에 소립자들 사이에서도 생긴다.)의 작용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왜 본인은 먹고 먹힘의 질서를 사랑으로 얘기하는 걸까요? 진위여부(眞僞與否)를 떠나 생명을 살리는 힘은 과학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말마따나 생명의 창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채우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진위(眞僞)를 식별하는 과학과 이성은 절대 없어선 안 되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로 생명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 최고의 과학기술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지구 반대편에서는 무고한 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문명의 발전이 사람을 못 죽이게 할 수 없고, 과학과 문명이 폭탄 투하를 막을 수 없습니다. 과학과 문명이 생명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지성의 한계입니다. 지성이 아무리 발전해 봐야 생명을 채울 수 있는 그 사랑 하나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외치는 소리는 언제나 고독하고 공허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외쳐야 함을 압니다. ‘생명’과 ‘사랑’이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한 가치임은 또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훼손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저는 그저 이 자리에서 한걸음의 변화, 생각의 자유, 더 큰 가치의 발견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혹 너나 나나 먹으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나만 사랑으로 먹히고자 마음먹으면, 먹으려고만 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겠습니다. 그렇지만 또 너무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마음껏 먹다가 오히려 너무 먹어서 병에 걸리지 않을까요. 통계를 자세히 조사해보진 않았지만, 오늘날은 못 먹어서 얻는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보다 너무 먹어서 얻는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그러니 먹히는 것에 초조함과 걱정이 있다면, 그냥 정진(精進)하시길 바랍니다. 옳은 길을 향해 걸어갈 때는 너무 옆길을 보지 않는 게 좋습니다. 프롤로그에서부터 얘기했지만, 생명과 사랑을 향해 걷는 이 길은 결코 틀릴 수 없으니까요. 먹힘으로 나의 생명을 넘어 보다 넓은 생명으로 가봅시다. 그 길 끝에서 진정 너머의 것을 발견하고,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는 더 큰 진리와 가치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그 길 중에 내가 사랑으로 내어준 몸보다 더 큰 사랑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큰 몸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26:26)     

     

2023년 10월 30일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