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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일오 Nov 27. 2023

눈사람이 유독 이뻐 보이는 이유

생명은 어느 계절에 피어날까요


    짧았던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왔습니다. 이제 새벽녘 안팎으로 영하권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밖을 나설 땐 입김이 제 안에 남아있는 따스한 가을 온기를 한 움큼 끄집어냅니다. 이미 움츠러든 어깨로 밖을 나서는 날이 많아졌지만, 본격적인 겨울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는 주변의 말에 더욱 움츠러드는 저의 어깨를 자주 봅니다. 추위 때문에 움츠러든 어깨인지 겁을 먹어서 움츠러든 어깨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어깨는 감기가 머물기에 딱 좋은 어깨인 것 같습니다. 오늘도 한껏 움츠러든 어깨로 출근길을 나서는데, 매서운 바람과 추위에도 떨어지지 않고 모처럼 내리 쐬는 햇살에 찰랑이는 나뭇잎을 보았습니다. 곧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그저 당당하게 ‘오늘’을 대하는 잎의 모습이 생기 없는 제 발걸음을 멈춰 세웠죠. 한동안 그 자리에 멀뚱히 서서 잎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레 어깨를 펴보니 어제보다 오늘 바람이 더 상쾌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또 눈을 들어보니 어제보다 오늘 하늘이 더 높아진 것 같습니다. 하루의 의미를 잃어버린 권태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를 그저 ‘덥다’에서 ‘춥다’로 느낄 뿐이라고 합니다. 여전한 생활 속에 단조롭고 습관화된 나날이 반복되면 오늘이라는 선물도, 삶이라는 매 순간의 기적도 느끼지 못한다는 이야기겠죠. 본격적인 겨울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자신의 운명 앞에서도 그저 당당하게 오늘을 맞이하는 나뭇잎을 쓰다듬으며 저는 괜시리 저의 하루는 잘 있는지 살펴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너스레 말을 걸어봅니다.


겨울, 죽음과 끝


    끝이 다가옵니다. 어느새 겨울이 성큼 우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2023년도 끝이 보이고, 저의 캐나다 생활도 흐릿하게나마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분명 아쉬운 마음이 무색하게 시간은 흐를 것이고, 분명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이 순간을 멈춰보려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지만, 시간은 멈춰있는 사진 밖에서 여전히 겨울을 향해 흘러갑니다. 핸드폰 영상 너머로 본 어머니의 얼굴에도 겨울의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먼 타국에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 싶지만서도, 그렇게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세월이 이미 많이 흘렀습니다. 어머니의 주름은 모른 척하고 더 마주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썩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만, 앞서 말했듯 제가 뭘 어찌한다 해도 결국 모든 것에는 ‘끝’이 존재하고, 결국 모든 것은 그 ‘끝’을 향해갑니다. 금년도, 인연도, 열정도, 일도, 꽃도, 삶도 곧 ‘끝’, ‘겨울’,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자신의 사형이 확정된 후 단두대를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늘 부풀려서 생각하기 마련이다. 실상은 모든 것이 매우 간단하다는 사실을 나는 시인해야 했다. 단두대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과 같은 높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치 누구를 마중 가듯이 걸어가다가 단두대와 마주치게 된다.” 끝이라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 이별이라는 것이, 겨울이라는 것이 참 거창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거창할 것 하나 없이 누구나 마주하는 것이고, 언제나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실제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도 교통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생전에 인터뷰를 통해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던 그가 정말 갑작스레 그 ‘더 의미 없는 끝’을 마주하게 된 것을 보면 아이러니함 속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들고, 끝은 끝끝내 모든 흔적을 지울 것입니다. 이별 앞에 ‘좋은’은 존재하지 않고, 겨울은 모든 것을 차갑게 얼어붙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모든 것을 삼킬 죽음을 향해, 끝끝내 내 모든 흔적을 지울 끝을 향해, 좋을 수 없는 이별을 향해, 모든 것이 차갑게 얼어붙을 겨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괜히 푸릇하던 마음도 시들어지는 느낌입니다. 그 ‘끝’ 앞에 피어나는 꽃이, 혹 누군가의 탄생과 죽음이, 열정으로 불태우는 일이, 뜨거운 관계가, 진지한 선택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결국 모든 것은 ‘끝’을 맞이하게 될 텐데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열정을 갖고, 업적을 이루고, 관계를 맺으며, 나를 채운다 한들 ‘끝’이라는 겨울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문뜩 끝으로 향하는 우리네 인생이 안쓰럽고, 결국 우리네 인생은 잿빛 인생인 것일까 씁쓸한 마음을 삼키게 됩니다. 끝 앞에 우리의 삶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요.


생명과 사랑을 찬미(讚美)하는 계절


    저는 어렸을 적 한 해의 시작이 겨울인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생명이 피어나는 봄을 두고 왜 하필 앙상한 나무들만이 존재하는 겨울의 한복판이 한 해의 시작일까 의문이었죠. 물론 남반구에 있는 나라들은 우리와 계절이 정반대이고, 천체의 움직임으로부터 달력(Calendar)을 만든 기준이 지역마다 다양하고 복잡할 수 있겠지만, 제 어렸을 적부터 그런 생각까지 했을 리는 없겠습니다. 근데 지금 어느 정도 자란 후에 생각해 보니 옛적부터 ‘끝’과 ‘죽음’을 상징했던 ‘겨울’이 한해의 시작점인 것이 썩 말이 되고 마음에 든다고 생각됩니다. 씁쓸할 것만 같은 ‘끝’과 ‘죽음’은 사실 그 어떤 것보다 ‘시작’과 ‘생명’을 빛나게 만드니 말입니다.


 살면서 빛만 본 사람은 어둠만 모르는 게 아니라 빛도 모르고, 고생해보지 않은 사람은 고생만 모르는 게 아니라 편함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시작은 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끝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생명도 시작도 알 수 없습니다.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코 앞까지 닥친 자신의 죽음 앞에서야 삶에 대한 해방감을 느끼며 이제야 모든 것을 살아볼 준비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소설의 작가 카뮈는 필연적인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 느끼는 ‘삶의 가치’, ‘삶에 대한 찬가(讚歌)’를 글에 녹인 것이죠. ‘끝’이라는 허무의 운명에 빠져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기적을 노래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내일 당장 죽는다면 우리가 오늘 보고 듣고 먹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절대 사소할 수 없습니다. 공기 맛도 달라지고, 바람소리도 기가 막힐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색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뭇잎의 색은 찬란하고, 길 위의 어린아이의 웃음은 세상의 모든 어둠을 몰아낼 것만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죽음과 끝이 곧 진정한 생명과 시작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또 죽음과 끝이 없다면 우리는 숨을 고를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바쁘게 몰아치는 기계사회인 오늘날,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죽음과 끝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 인간으로서의 삶의 중요한 것들을 돌아볼 새도 없이 그저 기계처럼 살아내기 바쁠 것입니다. 삶에 대한 성찰보다야 객관적인 달성만을 지향하는 오늘날이 아닙니까. 모든 동물들이 겨울엔 숨을 고르는데, 인간만이 문명이 발달하면서부터 객관적인 달성에 눈이 멀어 쉴 줄을 모릅니다. 덕분에 숨을 고르며, 힘을 비축하고, 삶을 돌아볼 시간이 없어졌습니다. 농경문화였을 당시만 해도 인간 역시 겨울에는 숨을 고르며, 힘을 비축하며, 진정 삶이란 것을 생각하고 발견하곤 했을 텐데 말입니다. 겨울이 없어진 지금, 인간에게는 삶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죽음과 끝 그리고 겨울을 잊게 되는 순간 우리는 숨을 고르는 법도 잊게 되는 것입니다. 곧 역설적이게도 죽음과 끝 그리고 겨울이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가라앉히고 생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주는 ‘삶의 인도자’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죽음과 겨울이 우리에게 진정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정말 죽음이 생명을 높이고, 끝이 생명을 가르치며, 겨울이 생명을 데워줍니다. 논어에는 ‘조지장사기명야비’(鳥之將死其鳴也悲) ‘인지장사기언야선‘(人之將死其言也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 역시 책에서 본 것인데, 새가 죽을 때 그 울음소리가 슬픈 것 같이, 사람이 죽을 때에는 자연히 그 본성으로 돌아가 그의 말이 착해진다는 의미입니다. 2001년 미국대폭발테러사건 911 사태 때, 추락하기 전 비행기 고도가 낮아지니까 비행기 안에 있던 수많은 승객들이 죽기 전 마지막 전화와 문자를 남겼다고 합니다. 1~2분 뒤에 죽을 운명인 그들이 무슨 내용을 남겼는지 아십니까? ‘너 내가 빌려준 돈 갚아야지’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건 내가 이뤘어야 했는데’ 이런 내용들을 남겼을까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각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 ‘보고 싶다.’ ‘미안하다, 고맙다.’ 등의 ‘사랑의 언어’들을 남겼다고 합니다. 죽음을 느낄 때, 끝을 느낄 때, 겨울을 느낄 때, 그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생명과 사랑을 그때 떠올리는 것입니다. 삶에 진정 중요한 것들은 우리가 생에 그리도 목매던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님을 겨울 앞에서야 죽음 앞에서야 끝 앞에서야 느끼고 떠올린다는 말입니다. 영하 50도인 남극의 눈보라에서야 피어나는 황제펭귄들의 아름다운 허들링(Huddling)처럼 죽음과 끝과 겨울 속에서야 우리는 생명과 사랑의 찬란한 빛을 피우는 것입니다. 여름에는 이웃의 체온만큼 불쾌한 것이 없지만, 겨울에는 이웃의 체온만큼 소중한 것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이라는 기적, 삶이라는 선물


    예, 우리는 여전히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모든 순간에는 끝이 존재하고, 그 끝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죠. 하지만 그 끝으로 향하는 우리의 인생은 끝이 있어서 잿빛이 되는 게 아니라, 끝이 있기에 금빛이 될 수 있습니다. 끝은 언제나 우리에게 금빛 찬란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죽음은 언제나 생명과 사랑의 가치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겨울은 우리에게 그 끝과 죽음을 생각하게 하여 기적 같은 오늘을 다시 우리에게 선물하죠. 다만 그 잿빛으로만 보이는 끝과 죽음과 겨울 속에서 금빛 생명과 사랑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겠습니다.


 저는 영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저의 인생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어바웃타임>이라는 영화죠. 족히 6-70번은 더 본 영화인데 신기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만 보게 되면 항상 뭔지 모를 감동(感動)이 밀려오는 영화입니다. 영화 속 시간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주인공 팀은 아버지에게서 시간여행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두 가지 방법을 배웁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평범한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시간을 뒤돌려 그 살은 하루를 거의 똑같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다만 처음 살 때에는 긴장과 걱정으로 보지 못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번에는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제야 보이기 시작합니다. 함께 모인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옆에 있는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빵집 직원의 미소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잠든 아내의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지나가는 사람이 들려주는 낯선 소리도 어쩜 그리 반갑고 재밌는지, 삶의 모든 순간이 얼마나 영화 같은지 말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조언으로 멋지고 완벽한 하루를 보낸 주인공 팀은 그 후 아버지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시간여행에서 마지막 교훈을 얻게 됩니다. 바로 오늘의 하루가 평범한 일상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로 향유(享有)하기 위해 애써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팀은 이 교훈으로 더 이상 시간여행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죠. 그저 이 놀라운 삶이라는 여행을 하루하루 향유하기 위해 ‘오늘’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제 진짜 겨울입니다. 이번 겨울, 삶의 겨울을 앞둔 사람처럼 살아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웃과 눈을 마주치고, 사람 앞에 웃음을 잃지 않고, 세상 만물에 경탄하며, 생명의 고동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의 지문을 발견하며, 모든 것을 사랑합시다. 진정 우리가 그렇게 오늘이라는 기적을 찬란하게 살아낸다면, 그 ‘오늘’은 하늘이 내게 허락하신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늘들이 만든 우리네 삶은 분명 찬란한 빛을, 따뜻한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전9:9)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은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전5:18-20)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12:7)


2023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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