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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일오 Dec 25. 2023

당신(사람)에게 쓰는 크리스마스 편지

Christmas is a day for you


    4개월 전쯤 135mm의 망원렌즈를 하나 샀습니다. 한국보다 훨씬 싼 가격에 팔고 있길래 별생각 없이 산 것인데, 왜 진작에 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현재 망원렌즈로 이곳 사람들의 일상을 자주 담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곳 사람들은 사진 찍히는 것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카메라를 들고 길을 다니다 보면, 자신 좀 찍어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고, 사진을 찍다가 눈이 마주치면 자세를 취해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길거리에 비싼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현지인들도 꽤 보이고요. 얼마 전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커플이 제게 다가와 무엇을 찍는지 묻고는 제가 원하는 장면을 연출해 준 적도 있습니다. 제 카메라는 필름 카메라라서 방금 찍은 사진을 바로 보여줄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하자, 그들은 아쉬운 웃음을 살짝 짓고는 제 갈 길을 걸어갔죠. 전 필름의 매력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이럴 때는 저 역시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맨 처음 필름 카메라를 샀을 때는 미세먼지 없는 하늘과 푸른 자연, 그리고 일상의 길목들을 주로 담았었습니다. 그땐 그런 것들이 참 깨끗하고 깔끔하니 제 눈에 자주 들어왔죠. 그런데 당시에 하늘과 자연, 길목을 깨끗하게 담으려 할 때마다 항상 거슬리던 것은 제 앵글 안에서 불규칙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불규칙한 위치와 움직임은 제 사진의 밸런스를 망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저의 앵글 바깥으로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셔터를 누르거나, 그냥 제가 앵글을 바꾸어 사람이 없는 쪽으로 셔터를 누르곤 했습니다. 여러모로 깔끔함을 위해 사람을 담고 싶지 않아 했죠. 그런데 최근 제 사진 중에서는 사람이 없는 사진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요즘 제 많은 사진이 일상 속의 사람을 찍은 사진일뿐더러 이제는 혹 자연을 찍더라도 끄트머리에 사람 한 명 걸칠 때에야 셔터를 누르곤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든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제 사진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들의 불규칙한 위치와 움직임 때문에 사진의 균형이 맞지 않을 때가 많고, 심지어 초점을 날리는 상황도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저의 앵글 속 사람들의 불규칙한 위치와 움직임은 그들만의 생동감(生動感)과 생기(生氣)가 되어 제 사진까지 살아있게 만듭니다. 그렇게 사람으로 인해 살아있는 듯한 사진을 볼 때면 때론 초점이 나가 있어도, 때론 깔끔하게 보이지 않아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에 웃음을 짓게 됩니다. 그저 깨끗하고 정갈하고 깔끔한 사진을 갖고 싶어서 사람을 마냥 거슬리는 존재로 없애려 했던 과거가 무색할 정도랄까요. 물론 단연 정물(靜物)이 깔끔합니다. 잘 찍힌 정물을 보고 있자면 참 정갈하고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조명들과 함께 어우러진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 앵글을 통해 가만히 보고 있자면, 왜 결국엔 ‘사람’에게 시선이 향하게 되는지, 왜 결국엔 ‘사람’에게 시선이 머물게 되는지, 왜 결국에 웃음을 자아내게 되는 건 ‘사람’인지를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잃어버린 세상


     사실 사람은 ‘보기 좋음’과 거리가 멉니다. 사람은 참 복잡하죠. 하나하나 변덕스럽고 다양합니다. 사람에게 보편(普遍)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회적으로 보편을 자주 이야기하지만, 그 역시도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생물이 다 그렇습니다. 생물에게 보편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 제각기 모두 다양하고, 모두 복잡하고, 모두 변덕스럽습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이 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 다르고 저 사람 다르고, 이때가 다르고 저 때가 다르고, 이럴 때 이렇고 저럴 때 저렇고, 이리도 튀고 저리도 튑니다. 심지어는 이럴 때 이러다가도 저럽니다. 이런 복잡하고 변덕스럽고 다양한 모습을 보기 좋다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날의 우리 세상은 점점 복잡한 사람을 빼기 시작합니다. 복잡하고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은 깔끔함에, 정갈함에, 편안함에 방해가 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성격 유형 검사)를 그렇게 묻습니다. MBTI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화의 시작을 도맡게 되었죠. MBTI에 빠진 사람들끼리의 대화를 옆에서 가만히 듣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곤 합니다. ‘나는 T라서 그런 거 못해’ ‘너는 J라서 그래’ ‘너가 S라고?’ ‘INTP은 안 그래’ ‘넌 딱 ISFJ 같아 보여’ 그렇게 다양하고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존재가 MBTI 안에서는 딱 열여섯 가지 부류로 깔끔하고 정갈하고 편안하게 통일됩니다. 그 열여섯 가지 성향 안에서 사람은 정해지고, 그 열여섯 가지 성향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죽음으로 만들어집니다. ‘너는 ISFJ로 태어났으니 그런 것이다’ 그렇게 복잡했던 인간이 그리도 깔끔하게 정리되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오늘날의 윤리(倫理)도 심리(心理)로 인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이 나빠서 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이런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왔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깔끔하게 분석되죠. 이처럼 사람과 정신도 과학으로 분석하기 시작하면 결국 사람도 유전자와 호르몬에 의해 지배되고 결정되는 깔끔한 로봇일 뿐입니다. 그 안에 복잡하게 살아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래 과학은 생명을 없애야 깔끔하게 성립되는 것입니다.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지만, 생물은 이리도 튀고 저리도 튀지 않습니까? 살아있는 개구리를 과학으로 설명하려면, 우선 죽여서 해부시켜야 가능한 겁니다. 생명을 정물로 만들고서야 깔끔하고 정갈하고 편안한 과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과학만 그렇습니까? 유물론적 사고가 그렇고, 일반화와 획일화가 그렇고, 통계와 수학이 그렇습니다. 그 안에 살아있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사람 하나 없는 달나라에서도 1 더하기 1은 2입니다. 수학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던가요? 오히려 수학에 있어 변덕스러운 생명은 거슬릴 뿐입니다. 통계 속 수천만 명이 그렇다 해도 사실 ‘수천만 명’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천만 명’은 없습니다. 다 한 사람의 탄생이자 죽음이자 성향이자 선택이자 생명일 뿐입니다. 깔끔하고 정갈하고 편안하게 보려고 사회가 살아있는 사람을 뺐을 때나 드러나는 것이 수천만 명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돈과 기계 역시 사람을 뺍니다. 노동은 사실 인간으로서의 삶의 실현 중 하나인데, 기계가 그것을 파괴하였습니다. 돈의 세상에서 적은 노력으로 큰 효율을 가져다주는 기계의 등장은 사람을 점점 세상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고, 사람은 더 이상 기계에게 밀려나지 않기 위해 점점 비인간화가 되어갑니다. 곧 일에 있어서 인간으로서의 삶의 실현보다는 경쟁, 생산, 효율만을 중시하는 기계화된 사람이 되어가죠. 돈 때문에 생명을 거래하는 비인륜적인 모습은 또 어떻습니까. 그런 비인륜적인 모습을 찾는 게 어렵지 않은 이 세상은 정말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에서 진짜 ‘사람’(생명)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 하늘만 보다가


     많이 조심스럽지만, 이보다 조금 더 마음 아픈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합니다. 교회도 점점 사람을 빼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렇진 않습니다. 일반화하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냥 최근 사람을 빼는 교회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듭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가장 기피하는 대상이 기독교인입니다. 최근 제가 캐나다에서 알게 된 한 친구는 모태신앙으로 자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배우자에 있어서 기독교인은 절대 만나고 싶지 않다 하더군요. 어떤 사정인지 차마 깊이 묻진 못했지만, 저 역시 한 과거가 있어 그 말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많은 교회가 사람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많은 교회가 사람이 사는 삶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만을 하곤 합니다. 많은 교회가 율법을 이야기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많은 교회가 거룩을 이야기하며 사람을 빼고, 많은 교회가 신앙이랍시고 사람을 없애고, 많은 교회가 하늘을 위한답시고 사람을 죽입니다. 교회가 하늘만을 이야기하느라 사람을 한 눈 들여다보질 않습니다. “하늘! 하늘! 하늘!”이라는 외침에 사람이 죽어가는지도 모른 채 여전히 “하늘!”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그 거룩으로 향하는 신앙이 매정하고 미워 보일 정도입니다. 그 거룩하다는 하늘 말고 자신을 좀 봐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의 욥기를 보면,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너무 생각해서 욥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배려해서 욥을 빼버립니다. 하나님을 너무 이야기하느라 욥을 없애 버립니다. 하나님을 너무 변호하느라 욥을 죽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참 이와 같습니다. 하늘을 너무 배려하고, 너무 이야기하고, 너무 변호하느라 사람을 놓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롬13:8)이라는, 율법은 진정 사람을 위한 것(막2:27)이라는 진짜 율법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적어지는 듯합니다. 사람을 향할 때 나타나는 진짜 거룩(사58장)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지금 얼마나 있을까 싶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깔끔하고 정갈하고 편안하게 하늘만을 이야기하다가 복잡하고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을 점점 빼버리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은 왜인지 그 높고 넓은 하늘의 품에 안길 수 없습니다. 각각의 교회가 제시하는 그 신앙의 틀 안에서 깔끔해져야만, 정갈해져야만, 맞춰져야만, 하늘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되죠. 교회가 믿고 알고 고백하고 닮고 싶다는 하늘은 그 복잡하고 어지럽고 다양하고 변덕스럽고 때로는 더럽기도 한 그 ‘사람’을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삶’ 가운데 찾아오셨는데 말입니다.(요1:14) 저는 궁금합니다. 하늘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시면서까지, 또 사람을 위해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사람의 삶에 눈을 두셨는데, 우리는 감히 사람을 내치면서까지 하늘을 위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과 사람의 삶을 죽이면서까지 하늘을 이야기하는 것이 진정 옳은 것일까요. 앞에서 우리의 외침을 듣고 있는 한 사람의 삶을 정작 우리는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하늘의 편에 섰다고 자랑스레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늘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기뻐하실까요.


크리스마스: 사람에 시선을 둡니다.


     오늘은 성탄(聖誕), 크리스마스(Christ-mas)입니다. 하늘이 사람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이 사는 이 땅에 내려오신 날이죠. 저는 크리스마스의 진짜 주인공은 감히 ‘당신’(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탄생일, 또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날로, 하늘과 예수님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으로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그 하늘과 예수님이 이 땅에 ‘당신’(사람)을 바라봄으로 오셨기에 저는 ‘당신’(사람)이 이 크리스마스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하늘의 시선은 ‘당신’(사람)에게 있고, 하늘의 마음은 ‘당신’(사람)에게 있고, 하늘의 몸은 ‘당신’(사람)에게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자신을 버리시면서까지 ‘당신’(사람)에게 향하기로 하셨으니까요. 요즘 신본주의(神本主義)는 결국 인본주의(人本主義)로 향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늘은 복잡하고 어지럽고 다양하고 변덕스럽고 때로는 더럽기도 한 ‘당신’(사람)을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고, 자신을 버리는 것은 할 수 있어도 ‘당신’(사람)에게서 하늘의 사랑을 끊는 것은 못하시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하늘도 감히 못하시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아마 ‘당신’(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성탄의 날’을 ‘사람의 날’이라고도 부르고 싶습니다. 가만히 보니 또 그렇지 않습니까? 하늘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사람이든 하늘을 인정하지 않고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든 간에 상관없이 이 날만큼은 그저 사람과 사랑이 넘쳐납니다. 연인들 간의 사랑이 세상에 넘쳐나고, 친구들 간의 웃음이 세상에 넘쳐나고, 가족들 간의 행복이 세상에 넘쳐나는 이 크리스마스는, 정말 사람만이 충만한 날입니다. 또 이 날에는 하늘의 손과 발이 되어 기댈 곳 하나 없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나눠주는 아름다운 모습도 분명 곳곳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날만큼 사람과 사랑이 풍성하게 피어나는 날이 또 있을까요? 참 아름다운 ‘사람의 날’, 곧 ‘크리스마스’입니다.


 오늘, 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잠잠히 사람을 생각해 봅니다. 잠잠히 사람을 느껴봅니다. 어디에서나 점점 사람이 사라져 가는 오늘날, 사람을 톺아봅니다. 복잡하고 다양하고 번덕스럽지만,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당신(사람), 그렇기에 살아있음의 뜨거움을 간직하고 있는 당신(사람), 그렇기에 생명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당신(사람). 그 생명의 아름다움을 계속 간직할 수 있도록 이 시간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하늘이 당신(사람)을 위해, 하늘이 당신(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하늘이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당신(사람)의 삶을 들어주기 위해, 하늘이 어디에도 설 곳 없는 당신(사람)의 설 곳이 되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는 우리는 하늘의 시선이 닿아있는 당신(사람)께 우리의 시선을 둡니다. 이제는 사람 편에 선 하늘을 보면서 하늘과 같은 편에 서는 법을 배웁니다.(엡5:1-2) 그렇게 오늘, 사람의 날, 크리스마스에 당신(사람)께 기쁜 소식(복음: 福音)을 전합니다. “하늘이 ‘당신’(사람)과 함께 합니다.”(Immanuel) 메리크리스마스.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눅2:10)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1:23)


2023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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