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두 가지 인간상(人間像)
‘유랑’(流浪)이라 정했습니다. 했던 일도, 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모두 분명하지 않은 저를 소개하라는 말에 엉겁결 ‘유랑’(流浪)이라는 이름을 올려놓았습니다. 흐를 유(流)에 물결 랑(浪), 흘러가는 물결. 그렇게 초청인지 기도인지 운명인지 의지인지 모르게 저는 저를 ‘유랑’(流浪)이라 불렀습니다.
한바탕 부딪힌 후 책상 위의 물건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은 떼고, 책은 챙기고, 문서는 파기하고, 물품은 동료들에게 여기저기 나누어 주었습니다. 동료들은 제게 우려를 표했습니다. 마음은 알지만 저는 아랑곳 않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무례를 범하던 상사는 자리를 정리하는 저를 보더니 적잖이 당황하며 오해가 있었다는 듯 저를 타일렀습니다. 이 역시 아랑곳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요란히, 더 분주히 자리를 정리했습니다.
그러다 멈칫,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아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흔들리는 찰나를 상사가 눈치챌까 사진을 급히 꽂아두고 책상을 마저 정리했습니다. “있어만 주세요. 저희는 선생님이 필요해요.” 제 손은 괜히 더 요란해졌습니다. 제 손은 괜히 더 분주해졌습니다. 저는 그 어떤 감정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입술을 힘껏 깨물었습니다. 피가 흐르든 눈물이 흐르든 무엇 하나는 흘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입술과 마음을 있는 힘껏 물었습니다.
뭘 그리 움켜쥐고 살려는지, 뭘 그리 지키며 살려는지, 뭘 그리 더 가지려 하는지, 그들의 과도한 욕망에서 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그 비린내를 맡으며 지내는 게 고역입니다. 그 썩은 물에서 자라나는 작은 생명이 안쓰럽습니다. 작은 생명에 콧방귀나 뀌고 있는 그들이 심히 원망스럽습니다. 욕망에서 자유로운 삶을 가르치지는 못할망정 그들의 탐욕스런 태도가 존재와의 단절을 마구 일삼으니, 이곳이 가히 초록일 수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물론 위태로운 삶을 꿋꿋하게 걸어내야 하는 모두의 처지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긴밀한 사정이 있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습니다. 너도나도 먹고사는 문제가 큰 화두요, 우리 모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바람이 거세다 해서 다른 이들을 내 욕망의 수단으로 삼는 행위를 옹호할 순 없습니다. 내가 크다 하여 다른 이들에게 이해를 강요할 순 없습니다. 내가 그리 살았다 해서 다른 이들에게 범하는 부조리를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어떻게든 움켜쥐고, 어떻게든 지키고, 어떻게든 더 가지기 위해 타인에게 주저 없이 무례한 그들 앞에 ‘나 역시 잘 부탁한다’ 웃음을 지어 보일 순 없습니다.
그렇게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과 아이들을 떠난 지 어언 석 달이 지났습니다. 깊이 사랑했던 만큼 아직 이별을 앓는 중일까요. 기껏 공간을 박차고 나왔건만,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길을 잃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존재의 확장을 위해 타국 생활을 하고 싶다고 아버지께 편지를 올렸을 때, 아버지는 제게 말했습니다. “누군들 하늘을 바라보며 살고 싶지 않겠느냐? 현실이 그렇지 못해서 끌려가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 뿐이다. 아빠도 그중의 한 사람이고.” 왜 하필 새로운 걸음을 시작해야 할 때 그 말이 계속 머리에 떠오를까요. 왜 하필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 지금 그 말이 계속 마음에 아려올까요.
“우리 이제 꿈같은 거 꿀 시기는 지나지 않았냐?” 올해 봄, 함께 꿈에 대해 배우며 자랐던 친구가 용기 내어 말했습니다. “저게 내 꿈값이야.” 친구는 최근에 뽑은 고급 승용차를 가리켰습니다. 같이 웃어넘겼지만 씁쓸했습니다. 그 말이 제 입에 많이 썼습니다. 너무 써서 웃음 뒤에 숨어 뱉었던 기침을 꽤 오랫동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누가 하늘을 바라보며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현실이 그렇지 못해 끌려가듯 살아가는 사람이 가히 많을 뿐입니다. 저들 역시 하늘을 바라보고 싶건만, 바라볼 수 없어서 꿈을 팔게 됐을 뿐입니다.
저는 바뀌지 않는 오늘의 현실을 그들에게 탓할 수 있을까요. 현실에 저항하지 않고 굴복했다고 그들을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요. 고급 승용차를 가리켜 그저 허영일뿐이라며 저만 고상한 척 굴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 찬란한 꿈이 까짓 고급 승용차로 밖에 대체되지 못해 괜히 미안한 마음일 뿐입니다. 그들이 품었던 꿈과 소망이 얼마나 찬란했을지 어림짐작하기에, 그 찬란한 꿈을 장렬히 포기한 그들의 용기가 부러울 뿐입니다. 그들은 ‘꿈’ 대신 ‘삶’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꿈도 살아있어야 꾸는 법입니다. 삶이 없으면 꿈도 없습니다. 그들은 꿈을 버리고 삶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잔혹한 현실을 몸으로 버티면서 저 같은 사람이 꿈꿀 수 있게 삶의 기반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삶의 자리 없이 꿈꾸는 게 가능했던 가요. 그들은 용감히 삶의 자리를 선택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있어만 주세요. 저희는 선생님이 필요해요.” 부조리에 입 다물고 그저 못난 어른으로라도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옳았을까요? 아니면 아이들에게 떳떳한 어른이기 위해서라도 그곳에 돌은 던지고 박차 나오는 것이 옳았을까요? 공간을 떠난 후 몇몇 아이들과 교류하며 알게 된 것은, 돌을 던진 게 무색할 만큼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름 자리까지 내어가며 돌을 던진다고 던졌건만 이제는 저라는 작은 방어막도 사라진 곳에서 아이들은 더 꾸덕한 비린내를 맡으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무치게 미안했고, 사무치게 후회스러웠습니다. 꿈쩍도 않는 벽에 저는 왜 제 사랑과 자리를 장렬히 내어 바쳤을까요. 무엇을 위해서였고, 과연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제가 내어 바친 자리에 장렬하다는 말을 써도 괜찮을까요.
인간에겐 두 가지 아름다운 상(像)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쏟아지는 현실을 온몸으로 거스르며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순교자’이고, 다른 하나는 잔혹한 현실에 꿈까지 팔아버리며 삶의 자리를 지켜내는 ‘영웅’입니다. 하나는 삶을 버려 꿈을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는 꿈을 버려 삶을 지키죠. 부딪히지 않아 영영 바뀌지 않는 삶을 그저 지켜내기만 하는 것이 맞는 걸까요. 아니면 종이짝 버리듯 자신의 삶을 버리고 목소리를 그저 내기만 하는 것이 맞는 걸까요. 어느 것이 더 아름답고 더 강인하고 더 찬란하고 더 가치 있는 건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를 버려야 하고, 다른 하나를 선택해야 할 뿐입니다.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에, 영웅과 순교자라는 아름다운 두 인간상에서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당신의 심장은 둘 중 어느 쪽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까? 당신은 영웅입니까? 아니면 순교자입니까? 끝내 삶의 자리를 잃더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 하늘의 꿈을 보이실 겁니까? 아니면 꿈을 팔아서라도 삶의 자리를 지켜내어 누군가가 설 수 있는 땅이 되어 주실 겁니까? 땅과 하늘. 그리고 영웅과 순교자. 이 갈림길에서 우리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걸까요.
지켜야 할 자신이 없고, 붙잡아야 할 자리가 없고, 움켜쥐어야 할 자산이 없을 때, 비로소 손과 발과 입은 맑게 울릴 수 있습니다. 움켜쥐는 사람은 받을 손도, 도울 손도 없는 게 사실입니다. 지키는 사람은 누릴 발이 없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외칠 입이 없습니다. 묶여있지 않아야 맑은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고여있지 않고 흘러야 숲에 초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초록을 만들 수 있는 건 흐를 유(流)에 물결 랑(浪), 흘러가는 물결이죠.
허나 정처 없이 떠도는 감정은 썩 좋지 않습니다. 삶의 자리가 없다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습니다. 저와 관계를 가진 대개의 사람은 제 안의 초록 꿈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이곤 하지만, 정작 저는 자리를 잃어가는 제가 자랑스럽거나 대견하지 않습니다. 고여있지 않고 흘러 만나는 곳곳에 초록을 남기는 것은 참 값진 일이지만, 그럼에도 깊은 질문은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이루었냐는 것이죠. 그래서 얼마나 초록이 되었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얼마나 풍성해졌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정녕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냐는 것이죠.
매번 선택의 기로에 서지만, 곧 새로운 일과 새로운 한 해와 새로운 나이로 시작해야 하는 이 시점, 저는 또 절박하게 문을 두드립니다. “무엇이 풍부한 삶입니까. 무엇이 넉넉한 삶입니까. 무엇이 영원한 삶입니까. 영웅과 순교자. 땅과 하늘.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창12:1-3)
**저는 모든 예술가는 순교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의 목소리, 너머의 풍경에 반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끝내 삶의 자리를 잃게 되더라도 말입니다.